현실과 타협하는 신앙(삿 2:11-2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노략질을 당하고 적에게 지고 재앙을 당하는 일이 사사시대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2:14-15)
무엇때문에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을 이같이 대우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1]에 악을 행한 데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2:11)
여기 말하는 이스라엘 자손이란 10절에 나오는 “그 후에 일어난 다음 세대”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본문 10절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선배들로부터 신앙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불운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영적 무지는 영적 범죄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배운 것이 없었고, 경험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신 31:9-13과 신 6:4-9절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말씀 통독으로 에스라의 부흥운동은 시작되었다)
오늘 본문에 이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 예배가 무너진 사람들은 반드시 악의 길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은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마음을 채울 다른 우상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의 자녀에게도 분명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녀들, 예배가 무너진 자녀들, 봉사가 뭔지 사명이 뭔지 모르는 자녀들, 어디를 가나 제대로 살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악의 길로 빠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예배가 무너지지 않도록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신앙적으로 바르게 세워져야 그들의 인생도 바르게 세워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도리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생의 시기에는 공부가 중요하고, 그래서 신앙은 이 시기가 지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주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중요한 때가 아닌 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을 해야 합니다. 취업을 하고 나면 승진을 해야 합니다. 승진만 하면 끝납니까? 결혼도 해야 되고, 자녀도 낳아야 되고, 또 다른 비전을 꿈꾸며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중요한 일의 연속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시점은 한 시점도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악’은 히브리어로 ‘רַע’이다. 그런데 ‘רַע’는 이중적인 의미, 때로는 ‘악’ 때로는 ‘재앙’이란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소리는 같은데 의미가 다른 동음이의어이다. 실제로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한 번은 ‘악’(2:11)으로 다른 한 번은 ‘재앙’(2:15)으로 쓰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스라엘이 ‘רַע’(악)를 범하자 하나님이 ‘רַע’(재앙)으로 갚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렘 2:13, 살전5:22)
이스라엘의 악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이 범한 악은 무엇인가? 도대체 이스라엘이 어떤 악을 범했기에 하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갚으시는가? 11-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악은 단 한 가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2]עָבַד] 것이다.
여호와를 버렸다[[3]עָזַב]는 것을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정말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 떠났는가? 이방 신들만을 그저 섬겼는가? 언뜻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단 한 번도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적이 없다. 밑져야 본전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버릴 필요가 엇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함께 다른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뿐이다.(혼합종교)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얼마든지 우상을 섬길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는가? 바알은 구름과 폭풍과 비의 신[4]이요. 아스다롯은 다산과 전쟁[5]의 신으로 두 신은 부부 관계이다. 가나안인들은 이 두신이 한 해의 소출과 다산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부부 신이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손의 수와 가축의 소산과 땅의 소출이 많아진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신들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인간의 세계에서 행하는 일이 신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의 세계관)
결국 가나안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사랑의 행위를 부추기기 위해 신전에서 예배의 한 행위로 술을 마시고 남자 신도는 신전 창기와, 여자 신도는 미동과 음행을 저질렀다. 이것을 단지 성적인 쾌락을 위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가증한 일이이었으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신나를 뿌려주는 것과 같았다. 인간의 본성과 죄는 조건만 갖추어 주면 활활타오른다.
현실적 이익에 민감한 것이 문제다
가나안인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자들이기에 곡식의 소출이 많았던 것 같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400년 간 애굽에서 성을 쌓고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였으므로 농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출이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의 신들에게 절함(עָבַד: 종처럼 섬김)으로써 많은 소출을 얻어보려는 미혹이 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종교는 육감적이고 쾌락적이었기에 매력의 정도가 컸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보다 망각을 잘하고 특별히 미신적이며 우리보다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하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적인 요소’에 민감했을 뿐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려고 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을 향유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자연스럽게 우상 숭배를 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현실타협종교로 전락) 이런 점에서 그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내 자신이 보인다.
종교가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와 손을 잡으면, 기복주의로 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순리다. 그래서 복음과 현실주의가 손을 잡으면, ‘번영의 신학, 기복신앙’이 나오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갱신해야할 이유로서
첫째, 기복신앙은 사람의 물질본능을 충동시켜 현실적 이해타산 심리를 만족케 하려고 신앙의 표적을 물질성취에 맞추어 기독교의 원리를 떠난 종교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내적 삶을 중시해야할 종교가 물질의 제한가치에 치중하여 영원한 내세의 가치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본래의 목적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기복신앙은 물질의 힘을 안위의 방편으로 삼고자 저급한 종교적 동기를 부여하고 기복적 신앙체계를 선호하여 아가페적인 동기가 없이 인간욕구와 물질동경에 호응하는 주술적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기복신앙은 대속의 교리와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의 개념이 없는 현세적 복을 강조하고 내세적 영복과 윤리적인 면이 없이 이기적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여 높은 품격의 중생한 인격회복을 도외시(度外視)한다는 점.
다섯째, 기복신앙은 신앙행위를 공적개념의 보상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본성적 약속에 근거하여(갈3:13-14) 그의 백성된 자의 영육간에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자의 주권을 경홀히 여긴다.
[1] 여호와의 목전(עַיִן)과 각기 자기의 소견(עַיִן) ; 여호와의 눈과 우리의 눈의 판단이 다름을 강조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마무리 하신 후의 평가를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창 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대로 되된 상태가 ‘טוֹב’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 바로 ‘טוֹב’인생이다.
[2] ‘עָבַד’는 work, serve as a slave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는 바로 그분의 철저한 종으로서의 섬김이다. 바울은 그래서 자신을 정의할 때 종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약의 표현으로 ‘둘로스’ 완전히 주인에게 묶여 있는 상태말이다. 우리 과연 그런가?
[3] ‘עָזַב’창 2:24, 부모를 떠나 다른 지체와 연합하기 위한 상태, advice를 더 이상 듣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조언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시 19:7-10, 딤후 3:16-17, 시 119:127, 97-100,1-3) 선언이며,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과 연합하겠다는 파혼을 선언하는 것이다.
[4] 신명기 11:8-17, 18-25 (기억하고 기억하라)
[5] 레위기 26: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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