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는 것들 (사사기 9:7-15)

 

인생에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 10가지를 적어보라. 그리고 그 중에서 그래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것 3가지를 남겨 보라. 여러분들은 내 인생에서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요? 쉽게 포기하고, 쉽게 타협하고, 쉽게 바꾸어 버리는 그 사람은 손에 잡힌 것이 있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이 무너진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담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열매 맺는 나무들과 가시나무입니다. 열매맺는 나무들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 이 나무들은 다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소중한,내 인생에서 포기해서는 안 될 본질적인 사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들이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우리 모두가 포기할 수 없는 본질적인 사명을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시나무가 쉽게 포기해 버린 것은 무엇인가를 보면서, 내가 포기해서는 안 될 본질적인 인생의 길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담은 네 그루의 나무 예화를 통해 자기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주된 포인트는 그 우화 속에 들어 있지 않고, 저주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그의 적용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담의 우화 속에는 잘못된 야망에 의해 결코 끌려 다니지 않는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something-driven life)

 

그리심 산은 세겜 남서쪽에 에발산과 마주 있는 작고 가파란 돌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갔을 때에 그리심 산에서 모세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1:29) 그래서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오늘 요담은 축복을 선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었다.

 

산꼭대기에서 이렇게 외치면 아래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의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실험에 의하면 그리심 산에서 외친 사람의 목소리가 에발산 꼭대기까지 들린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곳 골짜기가 좁고 돌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요담의 목소리는 산 아래에 있었던 세겜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담은 첩의 아들이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억울하고 괴로웠지만 이런 감정에 흔들려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오히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겜 사람들에게 전했다.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는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한 명령조의 말이었다. 이 표현은 아비멜렉이 ‘00ㅇ게 말하라. 생각하라’고 쓴 표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말이다. 아비멜렉의 표현은 세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존중하는 표현이었다. 반면에 요담의 표현은 매우 직설적이고 선포적이었다.

 

아비멜렉이 호감이 가는 화법을 쓴 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에 서지 않고 사람의 감정에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요담은 하나님 중심에 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나타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우리 귀에 거슬리는 표현이라고 해서 항상 틀린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정말 하나님 중심에 바로 선 말인가라는 점이다. 아무리 우리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중심에서 서지 않았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우리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신중하게 들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이 회개를 하였더라면 그들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를 들으시리라’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중심에 서서 이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유명한 요담의 나무 우화가 시작된다.

나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며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기드온과 그의 자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담이 상징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때 나무를 예로 들었다. 왜 일까? 그는 지금 나무의 본질적인 사명과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자세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나무는 본연의 열매를 맺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맡기신 본연의 열매를 맺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이들에게 나무들이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들이 왜 이런 나무들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히 하나님을 이해 열매 맺는 자들에게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분명한 자들에게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들은 거절합니다. 저절하는 이유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감람나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9을 보라. ‘나의 기름’이라고 했는데 올리브 기름은 당시 최고의 농산품이었다. 매일의 요리 뿐 아니라 약품으로, 연료로, 향ㅅ로 사용되었다. 본문에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는 제물을 바칠때, 사람에게는 임명할 때 기름을 부었다. 특히 왕로 기름 부을 때 올리브 기름을 사용했다.

 

이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말은 자기가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게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받은 사명은 많은 열매로 기름짜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버리고 어떻게 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본문에 충실하겠다는 말이다. 왕이 되는 것이 매력적인 것이긴 하지만, 내 인생에 절대로 포기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위치와 본문과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무화과나무도 마찬가지이다.  9:10-11을 보라.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찌 이것을 버리고 왕의 자리를 탐내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나무들은 모두 자기만의 존재 목적과 본분과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존재 목적이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열매맺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본분에 충실하며 거기서 풍성한 삶을 살고 만족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 욕심이나 다른 욕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일평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거기에 온전히 몰입하는 삶을 살았던 진정 행복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왕이라는 엄청난 제안과 유혹 속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인생의 목적-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자 모든 나무가 가시 나무에게 찾아갔습니다. 당시 가시나무는 메마른 산악지대에 많이 자라며, 유월절에 양을 굽기 위해 불을 지피는 데 사용했던 나무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가시나무는 일반적으로 땔깜으로만 사용했다. 가시나무는 왕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나무였다. 그에게는 편히 쉴 수 있는 그늘도 없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열매도 없고, 도리어 사람들을 가시로 찔러 고통만 주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구했다. 가시만 있어 강해보일지는 몰라도 왕의 자격이 전혀 없는 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걸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왕을 필요로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자격없는 자라도 왕이 되어 있으면 보호를 받고 나라가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격없는 자를 왕으로 세운 대가는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보다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왕의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백성에게 보호와 안전이 아닌가? ‘보호와 안전’을 얻는 대가로 백성은 왕에게 충성하고 그의 명령과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보호와 안전 즉 살롬을 원한다면 누구에게로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애걸해야 하는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닌가 말이다. 신자의 삶 가운데 살롬의 시작은 하나님을 찾았을 때이고, 엔살롬의 시작은 하나님을 잊었을 때이다. 명심하라. 

 

 32장에 보면 야곱이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32:22-32절에 보면 얍복 나루터에서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귀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의 모습,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평가를 내기기 앞서 우리는 야곱의 신앙의 모습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32:1-2을 보라. 그에 앞서 창 31:55에는 라반이 야곱의 가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라반의 축복으로 인해 그동안 삼촌에게 쫓기던 신세를 면하고 염려 없이 마음 편하게 길을 떠난다. 그러나 삼촌 라반 보다 더 큰 위협이 그의 앞에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날 야곱이 그토록 비열하게 속였던 형 에서가 그의 인생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이다. 반드시 넘어야 할 문제이며 커다란 염려의 산이었다.

 

야곱을 추적하던 라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바꾸신 분이 누구신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31:29 절 보라. 그리고 다음 문제인 야곱이 에서를 만나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 주신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님’,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야곱을 어떻게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하실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야곱의 신앙의 변화가 있었는가? 없다.

 

이런 신앙의 모습을 보면, 32장의 사건은 마치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과 같다. 문제 앞에만 서면 하나님의 약속을 다 잊어 버리고 낙망하지 않는가? 때로는 왜 내게 이런 문제가 찾아왔냐고 염려와 불평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진정한 보호와 안전은 야곱이 사용했던 그런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세겜사람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보호와 안전을 위해서 누구에게 애걸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고대 사회에서 군신의 관계라는 것이 이렇다. 왕이 백성에게 주는 서비스는 ‘보호와 안전’이다. 그리고 백성이 왕에게 주는 서비스는 ‘충성과 복종, 헌신’이었다. 이것은 마치 계약관계처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 없던 시절에는 경제적 여력이 많은 영주들이 군인들을 사는 것이었다. 자신의 돈을 주고 자신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력이 많은 사람은 자연적으로 군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사회의 초기의 군신의 관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정말로 자신들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와 안전’을 줄 것 같은 영주를 찾으면 왕으로 추대하고 상호간에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야심을 이루고자 하는 흑심을 품은 영주를 만나는 날에는 오히려 ‘보호와 안전’에 대한 세금을 톡톡히 치뤄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보았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호와 안전’을 주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라고 한 적이 있는가? 세금을 바치라고 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했던 서비스는 바로 ‘예배’다. 예배를 영어로 표현하면, Worship or Service.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쉬운 하나님의 방법에 실망한 것인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보호와 안전’이 아니라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전혀 다른 것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가시나무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이것은 공허한 약속입니다. 가시나무는 머리카락 같이 생긴 작은 잎사귀가 3-5개 정도 달려 있는 나무로써 쉴만한 그늘이 생길 수 없는 나무입니다. 만약 가시나무 밑으로 들어가면 열기를 식히기는 고사하고 가시에 찔려 상처만 더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약속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셨니다.  55:1-3을 보세요. [해석할 것] 하나님께로 오면 즐거움을 얻고, 우리의 영혼이 살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확실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들이 참으로 묘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가시나무의 말은 믿어요. 진리는 믿지 않고, 비진리는 어쩜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사탄의 유혹을 받을 후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일은 바로 지성이 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요 15:26-27 “너희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주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언하느니라”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도록 만드십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 즉 서비스, Service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집니다.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서비스, 경배하지 않으니 그들의 인생의 미래와 참 지식을 알 턱이 있습니까? 판단력이 흐려지니, 자신들을 해하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자신들을 ‘보호, 안전’해 달라고 애걸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이 우리의 ‘보호와 안전’을 주지 못합니다. 좋은 이력이 우리의 ‘보호와 안전’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현재 아니 미래까지 맡길 만한 펀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만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성경을 다 읽어 보신 분은 반드시 소망이 생기는데 바로 another world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이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적으신 10가지 중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잘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남 부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그렇게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3:13-18을 보겠습니다.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 속지 마세요. 사탄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가지고 신자를 유혹합니다. 오늘 가시 나무보세요.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느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할렐루야

 

이 보다 더 좋은 ‘보호와 안전’이 어디 있습니까? 이 보다 더 좋은 리더가 어디 있습니까? 이 보다 더 좋은 선한 왕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나무들은 내 인생에서 절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위치와 사명과 본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자기가 가진 야망이었습니다. 나의 꿈과 야망을 위해 신앙의 위치와 본문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시나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용규 교수님이라는 분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아 많은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을 발견하면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진짜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가짜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고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나의 인생의 ‘보호와 안전’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온 열정을 쏟았던 것 이 시간 다 내려놓으십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절대 가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