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병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로 가라 ( 4: 11-24)

 

가나안 땅에서 나온 여러 출토품을 보면 아주 고도의 굉장한 문명을 가졌던 것을 대개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그곳의 종교를 보면 다른 여러 문화에 비해 대단히 저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상 숭배.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이라는 신이 하나 있었다는 종교적인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그들의 신화를 보면 처음에 엘이라는 신이 있었고, 그 신이 아세라라는 여신과 혼인을 하여 거기서 자녀를 한 70명이나 두었는데,  70명이 다 신들이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머리가 되고, 능력이 많은 신이 누구인고 하니 주라고 부릴는 바알이라는 신이다.

 바알 신은 주로 비를 주장하고, 사람이 먹고사는 과실이나 채소등 초목을 자라게 하는 신이다. 바알 신은 다시 말하면, 자연 세력을 의인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로 사람이 먹고 사는 식물을 공급하는 일에 관계신 신으로 모든 피조물의 신이었던 것이다. 또 그런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영걸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을 의인화한 바알 신에 대한 신화가 북쪽 시리아 부근에서는 나중에 차츰차츰 어떻게 변화했는고 하니, 바알 신에게는 아스다롯이라는 아내가 있게 되었다 하는 식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북방 시리아 쪽에서는 아스다롯을 바알과 겸해서 섬겼다. 아스다롯은 마치 비너스 신과 같은 사랑과 생산의 신이었다. 그리고 바알은 천지의 주이고, 그의 왕국은 영원토록 대대로 끊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자세히 살펴 보면, 인간의 욕망이 신들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어떤 것에 투영하여 그것에 신성을 입히고 숭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아니 그것이 바로 .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인간이 창조적 상상력을 총동원한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와 역사는 구분된다. 때로는 신화를 통해 역사의 정통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기도 하지만 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기보다는 문화적 욕망 또는 두려움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다른 신화에 비해 각별한 이유는 모든 문화권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했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 사건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저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일어난 일이었다. 유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욕망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마음 가운데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멈출 수 없는 충동이다.

오늘날 할리웃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들의 테마가 신처럼 죽지 않고 신출귀몰하는 초인간(심지어는 드라큘라까지도 포함해)들의 활약상인 것은 이런 인간의 내면에 깔린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사랑과 배신, 미움과 증오, 인간사회에 악행이 퍼지게 된 사연 등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신들의 전쟁과 사랑 이야기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매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하며 살고 있다. 나이키, 아폴로, 박카스, 판도라, 비너스, 마이다스, 큐피드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상품 이름은 신화의 주인공들에게서 따온 이름들이다. 그런가 하면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이야기는 디즈니 만화영화로 유명한 ‘미녀와 야수’의 기본 줄거리가 되었고,인간에게 불을 가져온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 자신에게 스스로 반해 버린 나르시스,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이카로스의 날개와 추락, 바람둥이 제우스, 판도라의 상자, 피그말리온 효과, 오디푸스 콤플렉스, 카산드라의 예언 등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는 중세 근대를 거쳐 오면서 수많은 문학작품 영감을 제공해 왔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재확인한다. 아니 우리의 솔직한 자아가 들키지 않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말이다. 

오늘 전쟁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보라. 그리고 그 전쟁이 오늘 내 삶 속에서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음에 놀라기 바란다. 더 나아가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는 시스라가 어떻게 무너지는가? 보라.내 자신이 이렇게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인간의 야망과 그릇된 생각을 정리하라고 선포한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말한다. 14절이다. 일어나라([1]),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2] 이에 바락이 만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이에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믿음의 반응인 것이다. 말씀을 듣자 마자,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5:4-6 말씀을 마치고[주님편]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우리 반응],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보라. 15절이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3]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군대를 [4]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5]도망한지라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는 시스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상대해 주시는가? 혼란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5:4 하늘이 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물을 관장하는 신이 누구라고 가나안 사람들은 믿고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우상 숭배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오늘 가나안 백성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고 있는 바알인가? 

오늘 본문은 비와 번개를 누가 주관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는가? 바알도 아니요 그의 부인 아스다롯도 아니요. 엘도 아니도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나의 백성들아, 이것들아 정신 좀 차리라는 것이다. 시스라와 그 군대는 혼란에 빠졌지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 누구신가? 내 마음이 지금 든든하고 이유? 불안한 이유? 무엇때문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의지하고 있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들이 의지하고 자랑하는 철병거 900승과 싸우신다. 세상은 자꾸 우리 신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이는 철병거 900승을 만들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인류가 쌓아 올리고 있는 그 철병거 900승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하게 하실 것이다

옛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철병거 900승과 같은 딜을 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모습을 실제로 그런 역사를 만들었다.  4:16이하, 가인은 여호와 [6] 떠나서[7] 에덴 동쪽 [8]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르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5장의 에녹을 보라. 21절이하,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9]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4장과 5장을 비교해 보라. 세상의 사람들은 4장을 추구하면서 에녹성을 쌓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착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성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을 세상의 무대에 등장 시킴으로 그 세상 사람들에 대한 답을 주고 계신다. 진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란다. 너희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야 하는 자들이란다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10],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다시 본문으로 가보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자는 무엇으로 삽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해 보세요. 철병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로 가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저 왔어요기도하겠습니다. If we dont have a clear understanding of faith, we will find ourselves having faith in our faith, instead of having faith in our God.

오늘 싸움은 철병거 900승과 전투가 아니라 바알을 숭배하고 만들어 내어 자신을 숭배하는 인간의 하나님 됨과 싸움이다. 그것을 만들어 낸 인간의 허상, 욕망과의 싸움인 것이다.



[1]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2]  31: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3] ‘앞에서’, 말씀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아가는 자의 삶에 펼쳐지는 간증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스라와 대조되지 않는가? 시스라와 함께하며 보이는 병거와 군대는 시스라의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보지이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바락이 경험하고 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신자의 배짱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은 보이는 것, 철병거 900승 보다는,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붙잡는 사람이다. 야곱도 그랬다.( 32장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 에서 만나기 전

[4] 시스라가 의존하는 ‘모든’, ‘온’, 그리고 ‘그의’ 즉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5] 본인이 그토록 의지하는 것을 내려 놓고 떠나는 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헛된 것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삶의 현장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 

[6] 파님’은 ‘파나’라는 turn, look 즉 방향을 말한다. ‘파님’은 ‘before’ 즉 ~앞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 앞’을 떠났다는 것은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4 1절의 야싸프가 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코람데오(Before God)의 정신을 버린 것이다. 

[7] ‘야짜’는 뭔가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다는 의미, 가인은 하나님의 관섭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8] 방황의 의미, ‘쉼이 없는’ 의미, 놋 땅이라는 말은, [안식]이 없는 땅이라는 말이다. 여호와를 떠났기 때문이다.  

[9] 동행, ‘할라크’는 the manner[way] or pattern of life를 강조하는 것이다. 가인과 에녹은 정반대의 삶!!

[10] 이 말씀은 참으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내가 어디에 속했는가?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세상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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