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는 공동체:말의 능력 (사사기 20 1-25)

 

  영국인과 캐나다인, 그리고 촌사람 하나가 미지의 섬에 표류되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곤 코코넛 열매로부터 얻는 것이 전부였고, 며칠이 지나자 그들은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램프 하나가 해변으로 밀려 와 영국인이 그것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게 뭔가 생각하고 램프를 문지르자 지니가 튀어나와 각자에게 하나씩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영국인이 말했습니다. “나의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니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영국인이 사라졌습니다. 

   이걸 본 캐나다인이 말했습니다. “나도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캐나다인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촌사람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나는 너무 외로워요. 그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찢어진 공동체의 회복을 갈망하는 부담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사사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없이 도대체 무엇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공동체를 자기 마음대로 찢어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보복을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악에 받쳐서 무조건 부딪히고 보자는 심보로 공동체가 아픔을 겪고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를 자기 마음대로 찢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처럼 공동체를 찢어놓는 악한 모습들이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우는 일군으로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이스라엘 총회가 모임(1-3a)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0:1) 

   본문은 19장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한 레위사람이 도망간 첩을 데려오는 과정에 베냐민 기브아에서 당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몰려와 동성 성관계를 요구했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자기 첩을 내주었습니다. 그 첩은 밤새도록 성폭행 당한 뒤에 죽게 됩니다. 

   이때 레위사람은 그 문제를 보복하기 위해 시체를 12덩이로 쪼개어서 12지파에게 택배로 보냅니다. 이것을 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굉장히 흥분했고 함께 모여서 해결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 총회가 모인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1절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의미입니다. 단은 가장 북쪽에 있는 지명이고, 브엘세바는 가장 남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또 길르앗 땅이란 요단 동편 땅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전국 사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제히 모였고, 여호와 앞에 모였습니다. “일제히”라는 표현은 8절과 11절에도 계속 나오는 표현입니다. 사사도 없었고, 왕도 없었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모였다는 것은 법궤나 성막을 이곳으로 이동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상시국이 아니면 함부로 법궤를 이동하지 않습니다. 당시 성막과 법궤는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미스바로 옮겨왔다는 것은 지금 나라가 비상시국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20:2)

   여기 이 모임이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 백성의 어른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칼을 빼는 보병 40만 명이 함께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칼을 빼는 보병이 함께 모였다는 것은 이미 회의를 하기 전에 그들의 생각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칼로 베냐민을 징벌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40만 명이나 모였다는 것은 그들의 분노와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보복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부족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단지 악을 응징하겠다는 생각 뿐 지체를 함께 세워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20:3) 

   이런 모습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총회가 베냐민 지파를 제외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분쟁을 조절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제쳐두고 왕따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그들의 공감대를 일으키지 못했고, 그들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용서하고 받아줄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집단 따돌림이 일어난다면 여기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틀어지면 맞는 말이라도 듣지 않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가 나중에 막 나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정말 용서가 안 되고 집단 따돌림이 일어난다면 이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막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용서를 못하고, 한쪽은 맞는 말이지만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 없이 공동체가 회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은 충분히 미워할 수 있었습니다. 또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파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용서하고, 그들을 품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족공동체가 회복되고 죄를 징계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누려야 할 은혜가 바로 이런 은혜입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하신 분들이 혹시 공동체 안에 계십니까? 모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보복하겠다는 생각, 응징하겠다는 생각, 따돌리겠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공동체가 진정한 가족공동체로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레위인의 사건 진술(3b-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20:3) 

   총회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먼저 그 레위인에게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실수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처럼 전 이스라엘이 함께 모였는데, 성막과 법궤도 가져왔는데, 가장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만 듣고 쉽게 동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께 묻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내 삶의 체질이 되고 비결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을 찾고, 먼저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20:4)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인 레위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서 위선되고 왜곡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관점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부터가 거짓입니다. 

   그는 불법적으로 첩을 두었다는 사실도, 도망간 첩을 데려오는 과정도, 예루살렘에 유숙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가 조금만 서둘렀어도 목적지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빼먹었습니다. 기브아가 목적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브아가 목적지였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20:5) 

   이처럼 평안하게 기브아에 유숙하러 들어간 자기를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기를 죽이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때 몰려온 사람들은 기브아 사람들 전부가 아니라 그 성읍의 불량배였습니다. 어떤 저질의 사람들에 의한 범죄가 아닌, 그 성읍의 리더급에 있는 사람들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성적인 위협만 했을 뿐인데 말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첩을 욕보이고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기였고, 그들에게 첩을 몰아낸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말을 쏙 빼버린 것입니다. 실제 그 책임이 자기에게도 있음을 빼먹은 것입니다.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20:6) 

   자기가 시체를 12덩이로 쪼개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택배로 보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정말 기브아의 죄가 안타까워서 모든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런 일을 했던 것입니까? 

   실제로는 기브아의 죄가 안타까워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혼자 견디기에 너무 억울했기 때문에 가장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이스라엘 총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이 공동체를 더럽히는 망령된 죄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20:7)

   이제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을 자극시켜놓고 그는 이제 무대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공동체 안에 문제를 잔뜩 만들어놓고 자기는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는 편안하게 잘도 지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냐민 지파와의 1-2차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4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3차 전투에서는 베냐민 지파가 600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습니다. 레위사람은 자기를 위해 첩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이스라엘 총회를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공동체 안에 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기질이 강한 한 사람이 설득력 있는 말로 공동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런 인물 때문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자기표현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전체가 결국 위험한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이 가진 약점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쉽게 과장하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공동체의 유익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교회 공동체가 소수의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될 때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기질 강한 소수의 사람에 이끌려 다니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기질 강하신 분들은 교회 안에서는 자제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인간의 뜻에 의해 찢어지고 갈라지는 공동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는 공동체,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족 공동체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이스라엘 총회의 결의(8-11)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20:8) 

   레위사람의 설득력 있는 도전에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일제히”라는 말은 한 사람같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11절에도 하나같이 합심하여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처럼 하나가 되었던 때는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까? 

   형제자매를 죽이는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일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형제 죽이는 일에는 이처럼 잘도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고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러 가자고 결정합니다.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20:9-10) 

   제비를 뽑는데 각 지파별로 10분의 1씩 뽑아서 양식을 준비하고 징계하러 보내자고 결정합니다. 사실 기브아 성읍 하나를 징계하기 위해 40만이나 되는 군대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비뽑아 결정한 그 4만의 숫자는 모두 죽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1차 전투에서 22,000, 2차 전투에서 18,000명이 죽었으니 모두4만 명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20:11)

   그들이 이와 같이 결정하고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습니다. 물론 범죄한 성읍을 징벌하여 공동체를 거룩하게 세운다는 대의명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원칙 없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증언만 채택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본문에 이들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토론과 논의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자극적인 말만 듣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군중심리에 흥분하여 순간의 욱하는 감정으로 공동체 전체가 끌려간 것입니다. 

   알렉산더 이야기 중에 그의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친한 친구 중 클레토스라는 유능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때 그는 옆에 있던 군인의 창을 빼앗아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그 창을 맞고 클레토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알렉산더는 너무 괴로워했고 심지어 자결까지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이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간적인 분노와 감정을 극복하지 못해서 일이 커지고 만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후회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21:2-3을 보시면 베냐민 지파가 없어질 정도가 되니까 울면서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베냐민을 구제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찾고 난리를 치게 됩니다. 모두 신중하게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기도하며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욱하는 감정, 성급한 결정,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고, 더 나은 길을 발견하기 위해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기도하면 지혜도 주시고 방법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방법이 적용될 때 모든 갈등들이 은혜롭게 해결되고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무릎 꿇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4) 베냐민 지파의 완악한 모습(12-16)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20:12)

   먼저 그들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두루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라고 전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책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먼저 평안의 인사를 하기 이전에 책망하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베냐민이 기분 좋았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한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말은 옳았는데 공감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옳은 듯이 말하고 있지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을 한다고 하면서 상처를 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20:13-14)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기라고 말합니다. 기브아 사람들 중 불량배들만 처벌해야 하는데, 그들은 기브아 사람들이 곧 그 불량배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레위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증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브아 사람들 전체가 와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베냐민 자손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자존심의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총회에 모일 때 자기들만 쏙 빼먹은 것도 그렇고, 기브아 사람 전체를 불량배로 간주하는 것도 그렇고, 기브아 문제를 베냐민 지파 전체의 문제로 확대해석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의 행동을 그리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내에서 기브온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결정과 행동을 했다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적인 단결보다 지파적인 단결을 더 우선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이익보다 자기 지파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세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지파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지파들도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만 지적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사시대입니다. 기브아에서 일어난 이런 문제는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전 민족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너나 나나 똑 같은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결정이 어떤 결정이었습니까? 15-16절 말씀은 이렇게 싸우고자 했던 그들이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20:15-16)

   그들은 고작해야 26,000명이었습니다.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700명의 물매돌 저격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격솜씨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정확한 명사수의 솜씨였습니다. 하지만 적은 40만 군대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이건 무모한 전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이 악에 받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뉴스에 방학 중이지만 보충수업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야자 중에 몰래 나와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이 어떤 할머니의 집 담벼락에서 모여 피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담배 냄새도 들어오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도 들어오게 됩니다. 이게 싫어서 학생들에게 여기서 담배 피우지마. 그리고 시끄러우니까 딴 곳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창문이 깨어지고 돌이 방안으로 날아온 것입니다. 아이들이 할머니의 말을 듣고 악에 받쳐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 유리 파편 때문에 잠자던 아이가 큰 상처를 입을 뻔 했다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반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죽일 듯이 대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학교에 이 사실을 알리고 범죄학생을 처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그 학생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이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가 없는 사람, 회개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고 겸손하게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노한 백성들에게 처벌은 받았을지라도 계속 나오는 말씀처럼 공동체가 찢어지는 비극적인 운명은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상처받고 악에 받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에 받쳤다고 해도 그 악을 다 갚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악에 받쳐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결정을 내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공동체도 망하고, 나에게도 큰 피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것처럼 공동체에 파괴적인 것은 없습니다. 기분 나쁘다고 권위도 무시하고, 질서도 무시하고, 공동체도 무시하고 막나가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정말 교회가 순결한 공동체가 되려면 권징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직분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법의 권위를 인정할 때 공동체에 질서가 잡히고 능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시대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의 권위를 깊이 인정하여 교회를 순결하게 지켜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이스라엘의 패배(17-25)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20:17)

   이스라엘의 군대는 40만 명이나 되었고 그들 모두가 칼을 빼는 자였고 전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만이나 되는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한다면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이긴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사전에 막는 지혜가 더 중요한 것임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20:18) 

   이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다고 말씀합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미스바 서남쪽에 기브온이 있었고, 동북쪽에 벧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브온을 공격하기 이전에 잠시 반대 방향으로 물러나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한 번 보시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가 싸우리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질문입니까? 베냐민과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물어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미 싸움은 결정되어 있는데 이 싸움을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결정을 내린 뒤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려는 기도입니다. 만약 정상적으로 기도한다면 먼저 공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공격하는 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은 없는지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격에 대한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도는 했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먼저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승리에 대한 약속이 없다는 점을 잘 보셔야 합니다. 28절 말씀처럼 “너희가 이기리라. 너희 손에 붙이리라.” 이런 약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0:19-21)

   1차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패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해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베냐민 자손들도 나와서 그들과 맞붙어서 당일에 이스라엘 군대가 22,000명이 전사했습니다. 베냐민의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패배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0:22)

   이스라엘 사람들은 1차 전쟁에서 실패한 뒤에 엄청나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는데 왜 실패했을까?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피해를 보았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다시 전열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0:23) 

   이번에는 그들의 자세도 바뀌었고 기도제목도 조금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0:24-25)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치라고 하셨기 때문에 공격했는데 또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도 전사자가 많이 나와서 18,000명이나 죽었습니다. 1차와 2차 합쳐서 40,000명이 죽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씩이나 실패하게 하셨을까요? 나는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패배하게 하셨을까요? 

   먼저 자기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베냐민을 정죄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그들은 이런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26절에 그들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옳은 말을 한다는 것,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옳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은 사람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옳지 못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체들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하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우선입니다. 

   이때 우리의 말에 권위가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실패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항상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고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본문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공동체를 찢어놓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소수에 이끌리는 모습,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함,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 그리고 자기에게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나 때문에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공동체가 힘들어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때문에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나에게 이런 약점들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온전히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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