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에서 좋은 인물이 난다 ( 11:1-13)

 

 

10장 마지막에서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라고 질문했든데, 11장을 시작하면서 길르앗 사람 입다가 큰 용사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다는 바로 지도자를 찾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다의 출생과 성장 과정과 지금 현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합니다. 그는 기생이 길르앗에서 낳은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hn"+Az hV'äai 간음하는 여자, 매춘하는 여자라는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입다의 출생신분은 이스라엘을 구원할만한 큰 용사가 될 수 없는 불결한 신분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동시에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보세요. 이삭이 축복하면서 몰랐겠습니까? )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하나님, 그저 감사뿐입니다. 벧후 1:4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더 슬픈 것은,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입다를 쫓아내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입다를 향해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라고 말했습니다.  7절을 말씀에 의하면, 그는 그 지방의 장로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이 이처럼 벌레 취급을 받으면서 자기 집과 고향에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상처받은 영혼이죠.

우리 중에도 사람에게 상처받은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회복시키셔서 쓰십니다. 

본문 11:3을 보십시오. 입다는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비굴하게 구걸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돕 땅으로 가서 거기서 독립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돕 땅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좋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지역이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지금도 그 지역은 비옥한 곡식밭으로 유명한 땅입니다. 상처받은 영혼이 좋은 땅에 거하니 큰 용사로 준비된 것 입니다. 좋은 사람과 거하면, 영이 살아 있는 사람과 만나면 상처받은 영혼이 회복됩니다. 문제 있는 사람도 변합니다. 

아가페 교회도 이렇게 되길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the land of bAj’’인 것처럼, the church of grace, good으로 말입니다. 교회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가페 교회 아닙니까? 그러니 입다와 같은 어떤 사람이 온다 올지라도 은혜로 회복시키는 땅, 교회가 되기를 축원하니다. 단순히 땅만 좋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좋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감당하시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인간의 신분과 지위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입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며 그 속에 뭍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준비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를 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가페 교회도 입다처럼 여는 자가 많았으면 합니다. 기도, 헌신, 찬양, 치유, 전도, 회복, 부흥, 문제 해결.등 말입니다.

아가페 교회도, 아가페 교인도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할 일은 사람을 절대로 평가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지위, 환경, 성품, 기질,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그를 쓰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심한 신자라면, 먼저 나에 대한 기대라 하나님 앞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으로 옮겨가서 저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옆사람을 한 번 보세요. 어떠세요?]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을 다 아시죠. 간략하게 말하면, 흑인+백인  손잡고 뛰는 것, 백인 주인 아들+흑인 종 아들  같이 밥을 먹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상처받은 자와 상처를 준 자가 함께 손잡고 웃으며,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우리 예수님을 섬기는 그런 교회를 꿈꿉니다. 남녀나이고하에 관계없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한 없이 또 사랑하는 그런 교회를 꿈꿉니다.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할렐루야. 아가페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데려오려고’라는 단어의 원문은 빼앗고 탈취하듯이 데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입다가 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오겠다는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 만큼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입다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관이라는 말은 전쟁 때에만 필요해서 임명하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 10:24) 그들의 뉘앙스를 통해 입다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전쟁에서만 나를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또 다시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장관이라는 단어는 ‘!yciq'[콰찐]이고, 머리라는 단어는 ‘varo’입니다. 이 둘은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일시적(temporary) 리더를 말하고, 후자는 영구적인(permanent) 리더를 말합니다. 입다와 장로와의 대화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한쪽은 일시적으로 써 먹으려고 하고, 다른 쪽은 영구적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중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double mind’라 할 수 있죠..그러나 정직하게 들여다 보면, 이 모습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블 마인드’를 가지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리더가 되고 싶어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해결해 달라고 하고, 해결되면 돌아서서 일시적인 리더로 인정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일시적인 리더, 문제 해결사로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지금 장로들과 입다의 협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입다를 통해 당신의 심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잘 했습니다.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랬던 이스라엘이…이랬던 이스라엘의 묻던 신앙이…

이 모습이 혹시 나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찾기 보다는 세상말로 쿨(cool)하게 입다를 찾은 것입니다. 싼 값에 문제 해결을 해 볼려구요. 이런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 없습니다. 입다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 처음 믿으면 기도도 잘하고 응답도 잘받고 그럽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기도발보다는 도울 힘이 없는 방백들을 의지할 방법을 찾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대책이 없어요.

우상 숭배 안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고, 인간적인 방법 안하면, 우상 숭배하고…여호와 하나님만을 요리저리 피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합니다. 하나님을 일시적인 문제 해결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관계를 원하시고, 우리는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식이고…참 환장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못된 근성을 입다를 통해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이런 근성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고백하십시오. 

결국 입다가 가려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에게 아주 중요한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을 지적합니다. 9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결국 전쟁의 승패가 누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입다가 아니라, 입다를 쓰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 장로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신앙을 어디다 다 팔아 먹었는지

우리는 누가 나를 칭찬하려 하면, 빨리 그 사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7:2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빼앗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십계명 제 1계명이 무엇입니까?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beside) me. 여기 ‘me’는 ‘~ynIP'’이라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호와의 얼굴 옆에, 여호와의 얼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지 말라는 말은 5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섬기다는 ‘db;['’라는 동사로 ‘예배하다. 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정의한 하나님 여호와를 만을 ‘예배하고’, 그분 만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여호와는 ‘hw"hoy> ~yhil{a/’입니다. 앞에 있는 ‘hw"hoy>’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유일하게 Existing One, 즉 다른 것은 살아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죽은 신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 앞에, 남편이, 아내가 다른 여인을, 남편을 데리고 와 보세요. 어떻습니까? 여자들이 화가 나는 것은 자기 보다 더 못한 여인과 그렇고 그렇다는 것 입니다. 우리도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왜 안 그러실거라 생각하세요. 아니 왜 그렇게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하잖아요. ‘질투’라는 단어를 가만히 보면, 두 단어 모두에 ‘계집 여’자가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질은 병과 관련된 ‘병 질’이, 투는 ‘돌 석’자와 합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질투를 하면 ‘마음이 괴롭워 병이 생기고, 심지어는 상대를 향해 돌이 생깁니다.’ 안 그런가요…진짜로 좋아하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에 돌이 생겨 딱딱해 집니다. 굳어집니다. 잘 흐르던 혈이 흐르지 않습니다. 잘 먹던 음식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이 마음 속에 있는 돌을 상대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로 하여금 ‘질투’를 일어나게 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영광을 가로 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써주심에 대한 감사의 고백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자가 아가페 교회에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이 입다에게 도움을 구한 것은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땅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생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입다를 부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뺏길 지경에까지 왔습니까? [신자가 문제 앞에서 항상 물어야 할 질문]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땅에 대한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그 의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단지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터전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심으로 주시고자 하는 땅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입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2절에 보면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고 합니다. 입다는 지금 내 땅이라고 말합니다. 내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자신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머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머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땅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모두 다 ‘내 것’이라고 합니다. 고백해 보세요? 누구것입니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무엇때문에 그렇게 분통했습니까? 자신의 땅을 얻기 위해서였습니까? 자신의 이름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삼상 17:45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갑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회복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까? 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으라고 주신 잃어 버린 사랑의 마음입니까? 내 것, 내 땅의 회복입니까?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이러한 입다의 마음이나 암몬의 마음이나 이스라엘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땅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땅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질에 대한 생각?  

암몬 자손이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땅을 기반으로 해서 먹고사는 일에 풍성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땅은 인간에게 ‘소득’을 줍니다. 곡식과 목축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민족이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기억하십시오. 땅은 땅의 것을 줍니다. 하늘은 하늘의 것을 줍니다.

구약에서 의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어떤 자에게 을 주신다고 합니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온유하기로 소문난 모세의 땅은 몇 에이커?, 예수님? 바울? 그러니까 땅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얻은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은 단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물질을 가진 다는 것? 건강을 가진 다는 것? 자녀를 가진 다는 것? 사업장을 가진다는 것? 직장을 가진 다는 것? 를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땅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민족을 다 쫓아내신 것도 그들이 땅에서 살아가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을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신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소유권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자녀(물질,사업장,직장)가 누구것입니까?  이것이 입다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신이십니까? 땅을 주시는 신입니까? 물질적 안정을 주시는 신이십니까? 번영을 주시는 분이십니까? 어떻습니까? 

땅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애굽에서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좋은 땅에서, 광야는 어떻습니까? 그 척박한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서, 어떻습니까? 그들이 밟은 땅, 즉 삶의 질은 좋아졌지만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과연 땅의 문제였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이 문제였습니까? 무엇입니까? 

좋은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간다고 해서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생존을 위해서 땅에 집착을 하듯,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한 땅의 일에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서 내 힘으로 삼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소유당한자로서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중에 혹시 땅을, 기업을, 물질을, 건강을 잃을 지경에 왔습니까? ? 혹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단지 생존의 터전으로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으셨습니까?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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