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와 소몰이 ( 3:12-31)

 

 

이스라엘이 메소보다니마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아래에서 팔 년간을 고통당하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 옷니엘의 활약으로 40년간을 샬롬을 누리며 삽니다. 이스라엘이 그 기간 동안에는 정말 무죄한 삶을 살았을까요? 이스라엘의 본질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나’라는 우상에게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고 가나안의 문명과 이기를 여전히 사랑하는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 샬롬의 원인이었던 사사 옷니엘이 40년 후에 죽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샬롬이 깨지고 이스라엘은 다시 패역한 자로 드러납니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양식이 그대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쓰레기에 불과한 것임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2절로 갑니다.

3: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단어가 יָסַף[, add, increase, do again, continue, 전에 했던 행동의 연속을 강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사사기 내내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입니다. 몇 군데만 찾아보고 갈까요?

4: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야카프]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렇게 이스라엘은 사사가 사라지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그들의 속이 드러나 버립니다. 이게 비단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밖으로 나가면 그 즉시 내 속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인격과 자질과 성숙의 정도, 우리가 쌓아낸 공로와 업적 등의 모든 배경에 관계없이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 제외될 때 우리는 죽은 흙에 불과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인생의 여정을 통하여 바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존적 경험을 통과하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 , 또’[יָסַף] 다시 죄에 빠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존적 경험을 통하여 ‘나는 주님이 은혜로 덮으시지 않으면 안되는 구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그림을 바꾸어 그려보세요.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읽어 보셨듯이, 그리고 여러분의 실존적 경험을 통하여 익히 깨우치셨듯이 성도는 본질이 변하여 성자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여전히 죄 속에서 허우적대며 ‘또, , 또’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자신을 수시로 인식하고 목도하게 됩니다. 

그건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업적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겨주심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In Christ and With Christ]의 은혜에 의해서 거저 주어지게 된 것임을 교훈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훈 방법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남겨두시고 강성케 하신 대적들이 성도의 삶에 투입이 됩니다. 그리고는 성도를 장악하고 완전 만신창이가 되게 두들겨 팹니다. 그리고 그 대적들의 역할이 다 끝나게 되면 그 대적들은 용도폐기가 되어 멸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부르짖음, 즉 상한 심령이 성도의 삶 속에서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부르짖음과 상한 심령을 격발해 내는 그 대적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남겨두시고 하나님께서 강성케 하시는 그 대적이 꼭 외부에서 우리를 공격하던가요? 지금부터 제가 하나님께서 남겨두시고 하나님께서 강성케 하시는 대적의 정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여기에 보시면 제사라는 율법과 상한 심령이 대조가 되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제사의 행위로 의에 이르려 하고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의롭게 된다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성경의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다윗의 범죄가 역사 속에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그 유명한 밧세바 겁탈 사건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에게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속에서 터져 나온 다윗의 부르짖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오늘 본문의 사사 에훗의 이야기의 이해가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전사로 수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장수였습니다. 외양으로 볼 때에는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의 실체를 폭로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윗이 왕궁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다가 밖으로 나왔더니 마침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지요? 게다가 그 남편은 부재중이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에피소드를 단지 다윗의 이야기로만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러한 왕의 자리를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작은 왕으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선택을 하고 전쟁을 하며 삽니다. 

왕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 밧세바를 놓칠 리가 만무입니다. 다윗은 즉시 자신의 욕정을 채웠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요. 그리고 그 여인은 임신을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의 소욕을 채운 후에 그것을 은닉하기 위해 암몬의 칼에 그 여인의 남편을 죽게 만듭니다. 죄의 교활함과 추악함을 보세요. 죄는 그렇게 자신의 위상과 깨끗함을 위해 서슴없이 증거인멸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무섭습니다. 물론 그 증거 안에는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정작 그 죄의 주인은 자신임에도 다른 이를 죄의 주인으로 몰아넣고 자신만 살짝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실체였습니다. [삼하 11:4절의 그 여자가 부정함을 깨끗히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밧세바를 통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는 자신이 아주 훌륭한 의인인 줄 착각합니다.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자기가 해할 수 없다하여 옷자락만 베어 나오기도 했고, 하나님의 처소가 남루한 것이 마음이 아파 성전을 짓겠다고 나서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골리앗 앞에 서기도 했고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의 장수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겠지요? 그 와중에 죄 하나 지은 것, 괴롭긴 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로 그의 죄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는 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생래적이며 본질적인 죄성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 상한 심령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단은 구원자의 모형으로 다윗에게 보내졌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그 내용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삼하12:7-9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하나님께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음에도 인간은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환경에서 죄를 지은 아담은 바로 그러한 모든 인간 실존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완벽한 환경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성숙되거나 완성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이 그러한 에피소드들 안에서 반복되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래적, 본질적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지향하며 사는 자들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처방을 내리셔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 성을 발가벗겨 폭로시켜 버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진의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이로 나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건화된 작은 죄들을 짓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바로 죄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서 사건화된 그 작은 죄에 대한 용서의 부르짖음이 아닌 총체적인 인생의 구원을 부르짖도록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죄라는 원소로 만들어졌고 나라는 존재의 구성 재질이 죄’임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51:3-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요? 자신의 죄가 사건화 된 개별성을 띤 것이라면 자신은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죄를 지은 것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죄가 총체적이며 본질적인 하나님에 대한 죄의 열매로 맺혀진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개별적 죄들이 하나님께 지은 무서운 총체적 죄임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안타까움과 고통, 속상함, 해답 없음의 답답함 등을 상한 심령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은 깨끗하고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제사 행위),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인생의 답을 낼 수 없는 그런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상한심령)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멋지게 짓는 것도 아니고, 통일 왕국을 이루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안 보내주셨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감사합니다’라는 상한 심령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2:1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을 하지요?

4:4-8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스라엘에게서 사사가 떠납니다. 사사가 떠난 이스라엘은 곧 쓰레기처럼 세상에 나뒹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레기임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과 가나안의 문명과 가나안의 쾌락으로 자신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 힘을 쏟습니다. 그게 여호와 목전의 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죽이려 하는 우리의 대적의 정체가 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죽지요? 사망이 무엇 때문에 옵니까? 죄 때문에 오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대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적, 죄를 보내신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 죄를 도말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시게 하시고 그 죄를 강성케 하여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신들이 선악을 알게 된 뒤, 그 선악구조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고, 자기들의 판단에 선이라고 규정한 것을 모으고 쌓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하나님 됨을 챙깁니다. 하나님은 그걸 악이라고 하십니다. 악이나 죄라는 개념은 사건화 되고 개별화 되어 나타나는 행위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죄와 악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악이란, 하나님 절대 의존 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서 자아의존의 상태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이 바로 그 악의 상태에서 태어나 악을 살다가 악속에서 죽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 성도의 대적을 보내십니다. 그것도 두 배로 악한 놈이나 강성한 악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세요. 다윗은 죄인입니다. 죽는 날까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인 척 합니다. 왕의 행사를 꽤 잘 흉내를 냅니다. 착한 척, 용감한 척, 잘난 척, 종교적인 척, 아주 훌륭하게 왕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 속으로 그의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를 깨워서 보내 버리십니다. 다윗 안에 감추어져 있던 무서운 죄가 다윗에게 감지가 됩니다. 그때 다윗에게서 자기절망과 자기부인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51편을 보십시오. 그걸 상한 심령이라 했지요? 그게 바로 사사기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기시고 보내신 대적은 우리 안의 죄성으로 축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휘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위장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연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교묘하게 감추어 두고 위장해 둔 죄를 하나님께서 들추어 내 버리시는 것을 대적을 보내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절망과 자기부인의 장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참 사사이신 예수를 만나고 그분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등장한 모압, 암몬, 아말렉, 다 어디서 나온 자들입니까?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자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자손들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아들입니다. 인간 죄악의 산물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스라엘 곁에 놔두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스라엘이 배태하고 생산해 놓은 것들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경험케 하심으로 그들을 자기 절망과 자기 부인의 부르짖음, 상한 심령 속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좀 더 분명하게 그 사실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왕이 되고 싶어 하나님을 떠난 첫째 아담 속의 모든 죄인들을 모형하고 있는 자입니다. 17절에 보면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공물을 받아 챙겼고 그것으로 배를 채워 심히 비둔한 자였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왕 자리를 수호하고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아 비둔함을 유지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죄인들인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그 모압왕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했다고 나오지요?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가 어떤 성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점령이 된 그런 성입니다. 그런데 대적에 의해 그 여리고가 다시 점령을 당한 것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가능성과 업적과 공로를 의지하는 인본주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대적입니다. 

이들은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까지 모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했습니다. 종려나무 성읍이라는 것은 여리고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점령했던 여리고가 대적들에게 점령을 당할 뿐 아니라,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전진기지로 사용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정복했습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정복했던 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성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그 성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전진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훗은 모압왕 에글론에게 대표로 공물을 바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세리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세금을 거두어 대표로 그 세금을 기름덩어리인 에글론에게 바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죄인이지요. 게다가 그는 왼손잡이였습니다. 

당시에 왼손잡이는 장애인, 혹은 비정상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이 ‘왼손잡이’라고 번역한 히브리 어구는 ‘이쉬 잇테르 야드 예미노’인데 그 어구를 직역하면 ‘오른 손이 닫힌 남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른 손에 장애가 있어서 왼손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을 지칭할 때 ‘이쉬 잇테르 야드 예미노’라고 합니다. 물론 사사기 20장에 가면 베냐민 지파 안에 700명의 왼손잡이 용사가 나옵니다. 아마 베냐민 지파 안에는 왼손잡이들로만 구성된 군대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에훗은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국의 왕 앞에 나아가는데 식민지 세리가 몸수색 하나 당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던 것과 한 규빗(45cm)나 되는 칼을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오른 손을 거의 못 쓰는 장애인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고대시대의 통념에서도 그렇고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른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오른 손으로 능력을 행하신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오른손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하필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왼손잡이가 사사로 뽑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래적, 본질적 죄인 됨의 처절한 자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삶에 두 배로 악한 놈, 구산 리사다임, 비계 덩어리, 에글론 등을 보내셔서 바로 우리가 두 배로 악한 자들이며, 우리가 인본주의의 비계 덩어리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살려 주십시오’라는 부르짖음 뿐이고, 우리가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주여, 우리의 인생의 해답은 예수뿐입니다’라는 상한 심령뿐입니다.

삼갈(3:31):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임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3:31).

 

본문은 “에훗의 후에”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호합니다. 그의 이름 삼갈은 성경의 단 두 곳에만 언급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 “삼갈의 날”이라고 하는 기록과 오늘 본문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4:1에 에훗이 죽은 후에 바로 드보라와 바락이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서 아마 삼갈은 에훗이 너무 늙어 사사직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때부터 에훗이 죽기까지 사역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사역의 특징은 “소모는 막대기”입니다. 이 막대기는 2.4m의 장대 막대기입니다. 한쪽 끝에는 못이 박혀있어서 소를 모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다른 쪽에는 끌과 같은 모양의 쇠붙이가 달려있었습니다. 이것은 소모는 일 뿐 아니라 밭을 가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무기가 없었으므로 삼갈이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삼갈의 이야기는 여호와의 구원이 창과 칼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변변치 않은 무기를 가지고도 적들을 600명이나 죽일 수 있었습니다. 군인이 들어야 할 무기가 아닌 농부가 들어야 할 연장을 가지고 대적을 물리쳤습니다. 다윗의 물매돌이 생각납니다.

 

결국 이 메시지를 통해 “방법을 찾아 나서는 오늘날의 교회”에게 신선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것은 더 나은 방법이 없어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안 되어서 성장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용사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무기만 탓하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도전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는 “빈약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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