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 (삿 6:33-40)
양털 뭉치 시험 속에 나타난 인간의 진의
“주님이 집을 파는 것을 원하신다면 광고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다음 주에 이에 대해 문의를 하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문의가 오면 하나님이 승낙하시는 것을 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양털 뭉치 시험 방법이다. 심지어는 결혼 배우자를 정할 때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맨 먼저 자기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배우자인 줄로 알고 그렇게 결정하는 젊은이들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양털 뭉치 방법은 신앙이 약한 초보자보다는 경건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자주 사용하고 있다. 나 역시도 어릴 적에 “비가 올 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이 비를 그치게 해 주세요.” 요새는 이 기도에 응답이 없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가? 의심이 든다..ㅎㅎㅎ
그렇다면 과연 양털 뭉치 방법은 정당한 의사 결정 방법인가? 실제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이 전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양털 뭉치 방법으로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양털 뭉치 방법을 쓸 때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의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건을 세우고 양털을 내어 놓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리 속에서 하나님을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드온, 아니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태를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우리 인생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성경은 그러한 ‘존재의 제자리 찾음의 상태’를 ‘참 안식’이라고 한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
신 11:8-14절을 읽어보라.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그들의 안식 없는 삶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머물게 될 땅을 설명해 주신다. 10절을 보라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절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절 “네[1] 하나님[2] 여호와[3]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자의 삶: 천수답, 하늘만 쳐다보는 땅,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다. 말씀안에, 예수 안에 있는 삶이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 all your anxieties on him(대상), because he(대상)cares(현재,직설법) for you(대상)” He and You의 Relationship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7절은 분사형태로 6절과 연결되어 있다. 겸손하라를 6절의 명령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할 것인지를 7절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주님께 염려를 맡기는 것이 겸손한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시리라’(hupsoo, 훕쓰,,웁스..), ‘hupsoo’는 어떤 자리로부터 올리신다는 뜻이다. 그 문제의 자리로부터, 고통의 자리로부터,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자리로부터 ‘올려 주신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모세가 뱀을 들었다고 할 때, 쓰인 단어이다. 놋뱀을 들었을 때, 불뱀의 고난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결함을 받았다.
서두에 말했듯이, 기드온은 분명 반석과 불의 체험을 한 뒤 ‘내가 여호와를 만났다’는 고백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는 대답까지 들었던 사람이다.(23-24절)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뒤 거기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는 이름까지 지었던 사람이다.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맏아 자기 아버지 집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 버렸고 그 제단을 헐어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려와서 그 일을 행한 기드온을 죽이려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과연 바알이 신이라면 그신이 직접 벌을 줄것이니까 너희들이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남히 지켜 보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써 바알을 죽은 신, 없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거기에서 기드온의 별명이 바알과 쟁론하는 자, 즉 여룹바알로 지어지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지켜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드온이 또 하나님을 시험한다. 어떤 시험인가? 이번에는 이슬의 시험이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내가 정말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하나님께 이슬을 내려 확증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 또 다시 그의 말의 주어가 ‘나’이다. 기드온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보고 확인을 한 상태이다. 하나님과 대화까지 한 사람이다.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고 너를 그들을 한 사람 치듯이 할 것이라’(16절)는 분명한 약속까지 받았다. 그런데 왜 또 기드온은 하나님을 시험할까? 돌다리도 두르려 보고 건너기 위해서인가?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지금 기드온이 하나님께 이슬을 내려 ‘나’의 사역을 확증해 달라고 한 시점이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시점이다. 34절을 보라.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자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을 때에 기드온은 다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노린 것일까?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보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15절은 그의 자존감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성경지식이나 심지어 십자가까지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데 사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고 바로 그것이었다. 은사나 체험이나 종교 행위까지도 자기의 자랑으로 삼아서 다른 이들과의 차별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전 13장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가 나오는 것이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방법과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기의 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고 우리의 삶의 한 복판인 마음에 들어 오시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가면 어떤 경험을 하는가? 내가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슬 시험과 타작마당에 나타난 인간의 가치관
이 시험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타작마당이다. 이슬과 타작마당, 그건 이스라엘의 생명과 직결되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셔서 이스라엘의 농사를 주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맺힌 열매를 추수해서 타작을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송하며 감사하던 곳이 타작마당이다.
민 11: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신 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절 “당신(ךָ)은 복(אֶ֫שֶׁר)이 있도다. 이스라엘이여!” (אֶ֫שֶׁר) 정로의 상태(Relationship between God & I)
이렇게 하나님의 이슬은 이스라엘이 먹고 생명을 유지할 양식을 맺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이슬은 단순히 현상적으로 보이는 이슬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 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2절의 ‘교훈’은 ‘לֶ֫קַח’는 ‘doctrine, teaching’인데, 그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טַל’(이슬)이 지칭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면 그 말씀의 실체가 누구로 나타나는가?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성도에게 임하셔서 각 사람을 살려낸다.
따라서 이슬은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내가 하늘의 만나, 하늘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먹으라, 나를 마셔라’고 하신 것이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기드온은 그 이슬이 갖고 있는 진의를 알지 못하고 그 이슬로 말미암게 되는 이 세상 양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그 이슬 시험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사 6:15[열등감] 35[우월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타작마당을 이슬로 적셔 주실 분,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육적 샬롬을 회복시켜 주실 분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여전이 육신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 우리의 신앙의 자태를 보자. “이 비를 멈추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줄, 살아계시는 줄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우리의 고백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의 시험에 순순히 응해 주신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기대처럼 이스라엘의 육적이며 세상적인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뜻으로 그 시험에 순순히 응해 주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대는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기드온의 육적 기대와 의도를 부수어 버리심으로 해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은 여전히 육적 자아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기드온과 하나님의 전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사 10:24-27을 보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 애굽과 이스라엘 전쟁 그리고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전쟁의 목적을 동일시 하신다. 모든 전쟁은 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굽과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가나안 전쟁 이야기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는지를 알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전쟁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수 5:1-9에서 큰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제로(0)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쟁과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이스라엘의 육적 힘을 근거로 치러지는 것이 아님을 확고히 증명해 보이시는 것이다.
수 5장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요단 도하 사건을 기념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기념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보면, 수 4:20-24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그러니까 출애굽 전쟁과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사건을 고전10장에서는 세례라고 명명하고 있고, 가나안 전쟁 앞서서 하나님은 할례를 시키고 계신다. 세례와 할례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골 2:11-12에서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할례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육적 아담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격과 조건, 열심과 노력, 힘과 지혜가 다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 그릇 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뜻,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지는 것이 할례, 세례이다. 내가 아무런 능력과 자격이 없어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희생이 되어서 내가 살아났다는 표시를 몸에 가지는 것이 할례, 세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는 육적 몸을 벗고 영적인 몸,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은혜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출애굽과 가나안 전쟁, 그리고 오늘 미디안 전쟁은 동일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수 5:8-9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게 하시면서 그 초입에서 다시 말해 그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전쟁의 성격과 내용을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출애굽 홍해 사건도 그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육적 자아에 대한 기대와 신뢰와 의존을 부수고 오로지 구원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방법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열심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그 전쟁 때마다 초입에서 그 전쟁에 임해야 하는 모든 백성들의 ‘육적 자아에 칼을 대시는 것’이다. 그것이 할례이며, 세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눅 9:23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초입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 부인’부터 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무엇인가? 전쟁이야기다.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목숨 내놓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쟁아닌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 동일한 말씀하고 계신다. 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의 자아와 하나님의 전쟁…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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