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해의 신앙 ( 11:29-40)

 

믿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자기 이해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믿음을 말한다면 그 믿음은 틀림없이 인간의 상식에서 표출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이해와 믿음이 각각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이해' 자체가 곧 믿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이해란 무엇입니까? 과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답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아니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한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평행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의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고 인간은 감히 하늘을 꿈꿀 수 없는, 땅에서 땅과 함께 거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을 가진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직에 위치에 있다는 것은 땅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요구할 할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과 거래할 수도 없고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받아먹고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제대로 깨달은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이 믿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고산다는 것이 곧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이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역시 자기 이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고발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우리들의 실체를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좋은 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놓고 감상을 하듯이 입으로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을 바라만 보고 감상할 때 잊어버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고통입니다.

 

그저 그림을 즐기는 것만 있을 뿐 화가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의 그림을 직접 그릴 때 도저히 화가를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럴 때 그림을 감상하고 끝나기보다는 화가의 고통을 생각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역시 그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십자가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면서 다만 감상하는 것만으로,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해버립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과 죄인 됨을 알 것이고, 그 이해로 인해서 십자가의 능력이 어떠하며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자기 이해'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 이해 없이는 믿음을 말할 수 없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가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이해란 스스로의 무능력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깨달을 때 인간은 겸손해질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가 없을 때 인간은 교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과 평행의 위치에서 어떤 거래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뭔가 해줄 수 있는 분이라면 나 역시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다'는 교만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하고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러한 거래를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는다면 감히 하나님과 거래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입다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교만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입다의 교만에 의해서 누가 애매하게 희생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1장이 내용을 다시 요약을 하면, 입다는 큰 용사였지만 기생에게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가문의 위신을 생각한 본처 자식들에 의해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그 후 암몬 자손들이 자신들의 땅을 내어 놓아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결국 힘있는 입다를 찾아서 자기들의 머리로 삼을 테니까 암몬의 위협에서 구출해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입다는 암몬 자손들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부당함에 대해서 따지게 되고 결국 암몬 자손의 왕은 입다의 말을 거절하고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입다나 입다의 형제들이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힘의 논리로 일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힘이 필요 없을 때에는 체면과 위신과 가문을 힘으로 삼던 자들이 힘이 필요하자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자신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입다에게 매달리고 입다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쏙 빼놓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자기 좋은 대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신앙이 없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기억에는 하나님이 살아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전혀 살아 계시지 않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 역시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씀드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30,31절에 보십시오.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 자신을 자신에게 붙이시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구든 자신의 집 문에서 가장 먼저 나와서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입다의 교만이 어떤 것인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과 인간은 수직관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직관계에서는 거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위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감사할 뿐이지, 그것이 아래에 거하는 자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지 감히 위에 계신 분에게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나도 당신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입다가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 즉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과연 사람을 필요로 하신 분입니까? 결국 입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사람을 제물로, 그것도 가장 먼저 영접하는 자를 제물로 바친다고 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정성이 돋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헛된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렇게 해주시면 이렇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를 가지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을 희게 하고 검게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이라면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주시면 신학교를 가겠다느니, 아들을 목사가 되게 하겠다느니, 헌금 얼마를 바치겠다느니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 하나도 자기 마음 먹은 대로 검거나 희게 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검게 하시든 희게 하시든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을 한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 입다는 자신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오는 자가 자신의 종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습관에서 비롯된 자기 평가 즉 상식입니다. 종이라면 당연히 누구보다 먼저 상전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입다가 외출해서 돌아올 때면 종이 가장 먼저 영접했었기 때문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서원일 수도 있습니다. 상식적인 생각으로 판단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듯이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꼭 일어나는 것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이익이 많이 나는 지역이 꼭 이익이 날 것이라는 생각은 상식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변수가 항상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을 순간 순간 의지해야 합니다. 어쨌든 입다는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한 자는 자신이 제물로 삼아도 아깝지 않을 그런 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자기 생각에 아깝지 않은 것을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우리 선에서 아깝지 않을 것을 드리려 하며 거래를 합니다. 


그러나 일어난 상황은 입다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암몬 자손을 입다의 손에 붙이십니다. 결국 입다는 승리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한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던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고 말합니다. 비록 딸이 둘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아비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무남독녀 외딸이라면 입다로서는 무척 사랑하는 딸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취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생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생명입니다. 


이러한 입다의 마음은 3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는 구절을 보면 자신이 딸이 마중을 나오는 것을 본 입다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서원으로 인해서 결국 딸이 죽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어찌 참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입다의 딸은 입다의 교만으로 인해서 애매하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암몬 자손을 붙이신 것은, 입다의 불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암몬 자손을 붙이신 것이나 자신이 가장 먼저 아버지를 영접하게 된 것은 아비인 입다의 교만을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가 서원한 대로 자신에게 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녀인 상태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깨끗한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의 교만으로 인해서 깨끗한 딸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도우시면 자신을 영접한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 곧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신앙 없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는 것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시면 그냥 쓰시는 것이지 우리가 바치기를 기다려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바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릅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다에게 하나님은 입다의 딸을 입다에 의해서 죽게 하심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어떤 것임을 보게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주시고 입다의 딸을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다의 불신앙에 의해서 깨끗한 입다의 딸이 희생한 것처럼,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깨끗하신 그리스도가 희생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치 입다의 딸이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니 말한 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일로 여기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다가 자신의 딸을 보면서 자신이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애통해 한 것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애통해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참담해 하는 것이 십자가를 제대로 대한 신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의 삶에 십자가가 세워짐을 원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40
절에 보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본문의 중심은 입다도 아니고 입다의 승리도 아닙니다. 입다로 인해서 애매하게 희생한 입다의 딸이 중심입니다. 사람들은 매년 입다의 딸을 위해서 애곡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은 희생하신 분,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 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일을 중심으로 하지말고, 우리들의 죄악으로 인해 희생하신 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희생하신 분이 있음을 알고 그분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자신에 대해서 참담해한 경험이 있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임을 발견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생명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교회로 모였다면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고 어떻게 되어지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되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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