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상 ( 12:1-6)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는 감정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게서도 기쁠 때의 행동과 슬플 때의 행동, 분노했을 때의 행동들이 크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행동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절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지배된 채 전혀 뜻하지 않은 다른 행동을 보일 때가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이 누그러졌을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잠 16: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것이 우리들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노함을 참는다는 것은 잠시동안의 극복이지 노함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감정 자체를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감정에 의해서 인간의 행동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사실 인간의 감정은 타인에 대해서 무서운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서 살인을 하고 이웃을 해치는 소식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 그에 대한 칭찬의 말이 나오기보다는 흠잡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감정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여러 가지 악이 발생하는 것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시기와 질투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 자신조차 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가장 먼저 발생한 사건은 살인 사건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이면서도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까지 하게 된 것은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과 똑같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것을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시기며 질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은 인정하시고 자신은 거부하시는 것으로 인한 시기며 질투였던 것입니다.


가인의 시기와 질투는 자신과 동생을 비교함으로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동생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곧 살인입니다. 이처럼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는 형제라는 관계까지 깨뜨려버리고 살인을 일으키는 행동을 낳게 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지 않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고 나보다 잘난 것으로 보이고 나보다 많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웃에 대해서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단순히 이웃과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닌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발생한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결국 그 가문이 사만 이천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합니다. 이제 입다는 온 길르앗의 머리로 대접을 받을 것이고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시기하고 나선 자가 에브라임 사람들이었습니다. 


1
절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몰려와서 하는 말은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울 때 왜 우리를 불러서 함께 전쟁을 하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을 무시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입다 한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입다는 창녀가 낳은 자식으로서 자신들보다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감히 입다가 자신들의 영광보다 더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에브라임이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일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교인들이 어울려서 관광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몇 명이 어울려서 좋은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관광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럴 때 만약 여러분이 관광을 가자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할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섭섭함과 내가 무시당했다는 분노와 저희들끼리만 좋은 구경을 하고 왔다는 시기와 질투 등 참으로 여러 가지의 감정이 작용을 해서 자신을 빼놓은 채 관광을 간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빼놓은 것에 대해서 항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이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누리는 영광을 생각해 볼 때 자신들이 그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입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무시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이러한 시비는 입다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도 같은 시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8:1절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고 말합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전쟁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이심으로 인해서 크게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기드온이 승리한 것을 보고는 왜 우리를 전쟁에 부르지 않았느냐고 항변을 한 것입니다. 그때도 역시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승리함으로서 누리는 영광이 탐났던 것입니다. 우리도 전쟁에 참여했다면 저런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결국 기드온에 대한 섭섭함으로 이어지고 기드온에게 항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또 다시 입다에 대해서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자신들보다 뛰어나게 되고 자신들보다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입다에게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입다에 대한 시기는 입다와 그 집안을 없애버리겠다는 분노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분노는 에브라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있는 인간 모두에게 있는 분노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할 때 그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브라임의 마음인 것입니다. 


2
절을 보면 사실 입다는 에브라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라고 말합니다. 11장에서는 입다가 에브라임을 전쟁에 불렀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2절의 내용을 보면 입다가 에브라임을 전쟁에 불렀는데도 에브라임이 입다를 돕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이 억지를 부리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에브라임은 기드온에게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분명 그들은 기드온의 부름에 의해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였습니다( 7:24-25).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예 전쟁에 부르지 않았던 것처럼 기드온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입다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고 에브라임은 그 요청에 대해서 거절했으면서도 결국 전쟁이 입다의 승리로 돌아가고 그로 인해서 입다가 뛰어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시비에 대해서 입다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고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게 붙여서 승리하게 되었는데 이제와서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모아서 에브라임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4절의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는 말씀을 보면 전쟁을 하게 된 이유가 단지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입다와 길르앗을 무시하는 에브라임의 말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이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이며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헐뜯습니다. 즉 길르앗을 자신들에게서 도망을 친 하찮은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입다의 영광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도 역시 에브라임의 억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르앗은 므낫세 지파 사람인 마길의 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지( 26:29) 에브라임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들로서 같은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에브라임에서 도망을 쳤다고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면 어떻게든 그를 꺾기 위해서 온갖 말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에 대해서 참지를 못하고 에브라임과 전쟁을 하게 되고 그 전쟁에서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명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도망을 치는 에브라임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서 에브라임 땅과 연결되는 요단 나루턱을 지키고 나루를 건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볼렛이란 발음을 하게 해서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에브라임 사람으로 간주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본문의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이 본문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에브라임과 입다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자신보다 큰 영광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보이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입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 역시 누군가에게 무시를 받았을 때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본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지 내 영광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보다 더 누군가가 영광을 받고 높아지면 참지를 못합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를 간직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시비와 모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 것인데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둠으로 인해서 시기와 질투가 있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살인과 모함, 원망 등등의 악함이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입다의 승리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가지고 인간들이 서로 자기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는 문제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내것인양 여기고 그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 때문에 자랑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면 쓸데없이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이 너무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다른데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마음을 뺏긴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세상에 빼앗겼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보다 귀한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 때문에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땅의 것 때문에 누군가에 대해서 시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하늘의 영광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수시로 나오는 것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무시 받은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노입니다. 우리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발견될 때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죽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들임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죽어야 할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세상에서 참으로 귀한 것은 나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시고 오직 주님에게만 감사하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영광도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남으로부터 무시를 받으면 섭섭함과 분노가 나오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무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로부터 무시를 받으시고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맡겨진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시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우리의 성품을 발견하면서 또 다시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는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 대한 섭섭함이 있을 때 그 섭섭한 마음에서 자신의 악함과 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는 시기와 질투보다는 자기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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