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울고 있느냐? 운다고 해결되는가? ( 2:1-1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가나안의 신을 보여주십니다. 마치 선악과의 사건을 재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신, 세상의 우상을 덥석 문 삶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패역한 것인지를 경험하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자유를 어떻게 옭아매는 올무가 되는지를 처절하게 맛을 보게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에서부터 광야 교회, 가나안 정복전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올바른 자기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렀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가장 먼저 당도한 가나안 초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열두 돌을 쌓게 하셨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그 길갈에서부터 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호수아서의 길갈로 가보죠.. 4:18-24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시켜서 길갈에 열두 돌을 쌓으라고 하신 이유가 나오지요? 뭡니까?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궤에 의해서였음을 잊지 말라”(자칼)는 취지에서 요단 강의 돌 열둘을 취해 요단 서편에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다 건널 때까지 제사장들이 메고 있던 언약궤가 계속해서 요단강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제사장들과 언약궤가 요단에서 올라오자 요단 강물이 다시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말씀)에 의한 것임을 기념하는 돌이 길갈의 열두 돌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여호수아에게 명하십니다.  5 1-12절을 보시죠. 

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애굽의 수치란 애굽화 되어 버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더러움을 말합니다. 그 애굽의 수치를 제거 하시는데 할례를 행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의 옛 존재 전체를 부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할례는 인간의 생식기를 잘라버린다는 뜻이 있는 것이고, 인간 전 존재의 부정을 상징, 즉 자기 부인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4:4)"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할례의 원래 의미가 무엇입니까?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은 또 무엇입니까?  6:1-3 을 보십시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린 상태가 바로 의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어 버린 상태의 아담이 바로 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존재가 바로 육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 오셔서 바로 그 육을 죽여 버리시고 새로운 몸을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인간의 모든 육적 가능성을 다 소멸해 버리는 상징적 의식입니다. 신약의 표현으로 자기 부인의 현장인 것입니다. 나는 부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고 끌려가는 살아있는 은혜로운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필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할례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길갈의 이야기가 나오는 수 5 1절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가나안 족속들의 모든 왕이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병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러한 때에 전면전을 펼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스라엘 남자 전부에게 할례를 시켜버리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로 할례는 전투력 상실과 전쟁 포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때 가나안 어떤 족속이라도 쳐들어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서 몰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적의 땅에 들어와서는 전열을 정비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지는 못할망정 그나마 가지고 있는 전투력도 전부 0로 만들어 버리십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투력에 도움을 받아 전쟁을 치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목적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즉시 전쟁에 돌입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키고 싶으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전쟁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주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

길갈은 그런 곳입니다. 이제 곧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러야 할 이스라엘에게 이 전쟁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처루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치러지는 전쟁이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던져진 곳입니다.

그리고는 정말 얼마 있다가 여리고 성이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 여리고가 열리는 성이 된 것입니다. 칼 한 번 휘두른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냥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여리고라는 글자 밑에 이 붙어 열리고가 된 것입니다. 길갈은 바로 그런 교훈이 있는 장소입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는 곳이죠? 신자의 사는 방식을 배운 곳입니다. 

여러분 신자는 무엇으로 삽니까? 내 능력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내 지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나를 믿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자 그러면 이제 사사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길갈에서부터 오신 여호와의 사자가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랬어?” 그러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할례를 한 사람들이 할례의 정신을 잊어 버리고 자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된 사람들이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하다고 자신이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김은 어디인가요? 보김은 길갈에서 15miles쯤 떨어진 지역입니다. 원래 보김이라는 곳의 지명은 다른 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통곡을 한 곳이라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김은 어디일까요?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은 언약궤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언약궤는 벧엘에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 70인역에서는 보김이라는 단어를 울음의 장소라고 번역하고는 바로 이어서 벧엘과 이스라엘의 집이라는 어구를 넣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집은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있는 성막이 있는 곳을 말하고 벧엘은 그 성막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보김은 벧엘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벧엘은 아이 성이 있던 곳입니다. 

성경이 이 두 지명을 밝힘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아간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김과 아간을 비교해 보라. 다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간과 사울, 그리고 오늘 나를 보라. 보김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보김이라는 곳은 여호수아서의 아이 성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하고 그 언약의 성취를 여리고에서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에 가서는 아간을 통해 자신들의 속에 있는 자기가 하나님 됨의 모습이 그대로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사사기에서도 아이에서와 똑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다 진멸하라 하셨고 그들과 언약도 세워서는 안 되며 그들의 단은 반드시 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1장에서는 가나안의 문명과 그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에게 매료 당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팽개쳐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 즉 말씀에 의해 진행되고 성취된다는 것을 열두 돌 비석으로 굳게 세우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할례 언약을 행함으로 해서 자기 부인을 하고 인간의 노력과 힘은 하나님의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수시로 자신들의 눈과 귀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되고 싶은 미래를 스스로 꿈꾸었고 그러한 본인들의 욕망에 반하는 하나님의 언약, 말씀은 너무 가벼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그들의 이런 모습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성도에게는 영의 눈이 열리고 영의 귀가 열려 있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듣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속을 드려다 보면, 하나님 나라보다 이 세상을 크게 보고 하는 생활을 합니다. 간혹 세상에서 훌륭한 사라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세상에 뽐내는 사람을 비록 겉으로는 욕을 할지라도 속으로는 부러워하여 나도 기회만 있으면 저렇게 한번 되어 뽐내고 살았으면 좋겠다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안 버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백 번 배워도 그것이 그들 속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단지 성경 지식으로만 남는 것을 봅니다. 기독교의 경전의 지식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속내는 어떠합니까? 마음에 할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체의 할례를 행하니 육신을 자신의 원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해야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우리의 행동의 원천입니다.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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