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과 순종 ( 1:16-36)

 

사사기를 읽을 때 우리는 사사시대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삶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 징계를 받고 → 돌이키고 → 회복된 후에 다시 하나님을 떠나는 시대"였습니다. 사사시대는 이처럼 계속해서 이전의 모습과 삶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저는 중고등부 시절에 사사기를 처음 읽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은 사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저의 삶이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도 역시 이처럼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꾸만 이전의 모습과 삶으로 돌아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제목을 영어로 보니까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같은 방향 안에서 오래도록 순종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영성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에 이런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은 방향을 결정했다.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 마음을 품으시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사시대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사사시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본문 1장 전체는 사사시대의 정치적인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정치적인 원인은 "약속의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음"에 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가나안 족속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들의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들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15절까지 유다 지파의 행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순탄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16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온전한 믿음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철병거 앞에서 무너졌고, 강한 아낙 족속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번영을 위해 그들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들을 살려주는 일도 발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순수한 믿음으로 전진하는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견고한 진이 가로막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고, 번영과 쾌락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무너진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사시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 겐 사람(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1:16)."

갑자기 겐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이 사람들은 모세의 처남 호밥의 후손들이었습니다(삿4:11). 이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했다고 기록합니다(16).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 성읍을 의미합니다(신34:3). 그들은 저주받은 땅 여리고에서 올라와서 유다 지파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왜 이 이야기가 이 시점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삿4:17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5:24 참조).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에게 물 대신 우유를 먹이고 재워서 말뚝으로 그를 죽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셨습니다(삿4:23)."

 

) 계속된 정복 행진(17-20)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1:17)."

유다와 시므온은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고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불렀습니다(17). 이제 유다는 눈을 블레셋 땅으로 돌려서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과 그 경내를 정복하였습니다(18). 그리고 이렇게 정복한 원인을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18-19)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을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19). 이전에 여호수아는 "그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들을 쫓아내리라(수17:18)."고 도전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철병거 때문에 정복 행진이 멈추어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대적들을 진멸하는 하나님의 전투를 잘 감당하다가 "철병거" 앞에서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철저한 전진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다가 어떤 대적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 대적은 어떤 대적들입니까? 이때 우리는 여호수아의 도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들을 쫓아내리라."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제 20절을 함께 볼까요?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1:20)."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줌으로 거기서 그가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다는 기록으로 유다의 정복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헤브론의 아낙 사람들은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습니다(수14:15). 유다 자손들이 철병거가 있는 골짜기의 성읍들을 쫓아내지 못한 반면에, 갈렙은 헤브론에 거한 아낙 자손들을 쫓아내었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싸움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상황에 의해 좌절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 어떠한 대적들도 무찌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앞에 가로막고 있는 대적들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전진하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베냐민 지파(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니라(21)." 여부스 사람은 "아래로 짓밟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 짓밟는 자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오늘날까지라는 말은 다윗 시대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도 침공을 하였고 베냐민도 공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 시대까지 요새화된 그들의 성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요셉 지파(22-29)

 ) 벧엘 정복(22-26)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1:22)."

드디어 요셉 족속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기록합니다(22). 먼저 그들은 본 이름이 루스였던 벧엘을 정탐합니다(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1:23)."

탐정이 그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입구를 가르쳐주면 너를 선대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24). 그 사람이 입구를 가르치자 요셉 자손들은 그 성읍을 쳤고 그 사람과 그 가족들만 놓아 보내었습니다(25).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1:24-25)."

이것은 마치 여리고를 정복할 때 라합과 그 가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라합과는 달리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고 합니다(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 곳의 이름이더라(1:26)."

만약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했다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많은 축복들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스(분리)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는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벧엘의 본 이름인 루스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한 것은 옛날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교회에 무언가 있을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시작하기보다 다시 옛 길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 므낫세(27-28)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1:27)."

본문은 므낫세가 벳스안, 다아낙, , 이블르암,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음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의미있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직접 부딪혀보니 별것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결심하고 그 땅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를 보장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와 함께 동행하지 않을 때 적들도 우리를 우습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28)."

28절에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고 대신 사역을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풍요를 위해 적과 타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나중에 "여호와의 사자"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것이라고 책망합니다(2:2-3).

   충분히 쫓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대적들도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대적들이 끝까지 우리에게 올무가 되고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삶이 고달파지고 힘들어집니다. 참된 행복과 기쁨은 주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 에브라임(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1:29)."

에브라임 지파도 마찬가지로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역을 시켰다는 말은 종으로 부렸다는 의미입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과 쫓아내지 않고 사역을 시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요셉 자손들은 여호수아가 말한 대로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는 족속이었습니다(수17:17).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22).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음으로 대적들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덕분에 두려워 떨던 대적들은 아예 결심하고 그 땅에서 물러서지 않는 결과를 맺고 말았습니다(27).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모두가 자기들의 이익과 세상적인 풍요를 위해 대적들과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거역한 행위이며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순종한 것입니다. 덕분에 그들 가운데 남겨진 가나안 사람들은 나중에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는 저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1)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고 따르는 삶과 2)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대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익 때문에 이러한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삶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저주스런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4) 나머지 지파들의 정복(30-36)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1:30)."

스불론 지파는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다고 기록합니다(30). 또한 아셀도 마찬가지로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1-32).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1:31-32)."

 

납달리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며 가나안 사람들을 종으로 부렸습니다(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1:33)."

결국 이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거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기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주민들을 죽이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고의로 어기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 부려먹기 위해 살려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단 지파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34-36).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1:34-36)."

지금까지 다른 지파의 이야기의 주어는 지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34절의 주어가 "아모리 사람"입니다.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끌려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죄악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정복은 고사하고 그 가운데 정착하지도 못하고 산악 지대로 밀려난 것입니다. 정말 딱한 현실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도 세상에 종노릇하며 기쁨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할 자들이 세상의 지배를 당하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주도권을 세상에 빼앗기고 거기서 끌려 다니며 영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회복하십시오.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마시고, 세상을 끌어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기쁨은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은 약속의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가장 유력한 지파이었던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도 실패했습니다. 유다 지파는 골짜기의 철병거가 있는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요셉 지파는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지 않고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불순종은 다른 지파들의 불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 고의적으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했습니다. 심지어 단 지파같은 경우는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 분배받은 땅에서 쫓겨나 북쪽 산간 지대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그들은 적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들을 정복하는 것에 실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세상적인 필요에 의해 그들과 타협하게 되었고 말씀을 부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약속의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원인은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우리의 믿음의 행보도 이와 같습니다.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의 지혜와 세상 경력을 의지하기 시작할 때 실패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기록된 말씀을 따라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방향이 결정된 사람들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하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대적들로 인해,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재물과 권력에 의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오직 한 길,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날에 주님이 주시는 칭찬과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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