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통찰력의 중요성 (사사기 9:30-57)

 

[1] 마지막 기회를 살린 여인 (50-53)

여러분은 마지막 때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납니까? 아마 대부분 ‘죽음’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회’라는 말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것은 기회가 없어진다는 뜻이며, 아직 마지막 한번의 기회가 남아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지막 단 한 번의 기회로 영웅이 된 한 여인이 등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할 마지막 남은 짧은 기회를 자기 체면과 명서을 지키는데 다 써버린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은 마지막 때를 만났을 때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시기 9장은 아비멜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겜사람들과 아비멜렉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이제 세겜 망대로 도망갔던 천 명의 사람들까지 다 죽었습니다. 세겜 성도 무너졌고 남은 사람들도 모조리 처단했습니다.[아비멜렉+스불  가알], [아비멜렉  데베스]

 

아비멜렉은 데베스라는 성읍으로 달려갑니다. 이렇게 공격하면서 아비멜렉은 망대의 문에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세겜 망대에서 했던 것처럼 데베스 망대도 불태우기 위해 망대의 문까지 가까이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망대는 세겜 망대와는 달리 ‘견고한 망대’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의를 요하는 견고한 망대에 너무 쉽게 가까이 접근했고, 그것을 본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를 맞아 죽는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만심이 결국 화를 가져왔다. 분노가 또다른 화를 가져왔다. 아비멜렉의 기질, 형제도 한 바위에서 죽이고, 반대하는 자도 불태워 죽이고 그 악의 정도가 극에 달한다.

 

그러니까 아비멜렉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가 되니까 개념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망대는 수비만 하는 단순한 망대가 아니라 공격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언제 망대 안에서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곳에 아무 대책없이 그토록 가까이 접근했던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고대사회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은 활과 창을 이용해 전투를 했고, 여자들은 무거운 물건이나 돌을 던져서 전투에 참여했다. 행주산성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생각해 보라. 오늘 본문에서도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리 던졌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평소에 볼링을 자주쳐서 뭘 던져서 맞추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5층 건물 높이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사람 머리만한 동그라미 물체를 20kg정도의 돌을 던져서 한 에 맞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만큼 맷돌을 던져서 사람 머리를 정통으로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던진 맷돌로 적장을 이길수 있는 특별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니 그 돌이 적장을 죽이는 일등공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고 있는 것이 보잘 것없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능력으로 들어 쓰시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9:56 하나님이 갚으셨다에 근거해서) 다윗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칼과 단창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당시 최고의 적골리앗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자신 있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전진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경험해야 할 축복이 바로 이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분명한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실력과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나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 좋은 것, 놀라운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조건이 안 되었거나 나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내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때 우리가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위대한 일에 쓰임 받는 놀라운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놀랍게 이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전쟁이 끝나고 이 여인은 그 성읍에서 최고의 용사로 추대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기회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이걸 살리면 영웅이 되고, 못 살리면 역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회를 붙잡고 승리하여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되기 위해 오늘 내가 가진 것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내 삶에서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이기고, 도저히 풀수 없는 문제도 풀고, 도저히 감당할 수없는 시련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을 감당했을 때에는 아무도 그것을 간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하며 우리는 자랑스럽게 하나님을 높이고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간증이 우리 교회에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단 한번의 기회가 왔을 때 여러분들이 던진 맷돌이 적장의 머리를 박살내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매 순간 만나는 마지막 때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여,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이런 간증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2] 마지막 기회를 놓친 아비멜렉(54-55)

아비멜렉은 급하게 병기 잡은 소년을 불러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다급하게 부탁합니다.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오명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삼하 11:21 ‘여룹세벳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 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위에 던지매 저하 데베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아비멜렉은 자기의 죽음을 비밀로 숨기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 죽음의 비밀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여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게끔 조치를 취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이런 최후의 순간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모든 일이 결말지어진 것은 하나님의 심판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들앞에서 명성과 체면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벗기 위해 남은 인생을 다 써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마저 잃어 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각기 자기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지도자 밑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살았던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관계성을 새롭게 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비멜렉처럼 짧은 순간을 남겨놓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주님 앞에 설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아름답게 결말짓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자기 체면을 세우는 일에 빠져 살 것입니까?

 

아비멜렉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순간이 되면 반드시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뿐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며, 위기의 순간 뿐 아니라 형통의 순간에도 우리는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의 자세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 만약 저같이 떡이나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떡을 다 먹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이죠?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보면, 사형수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 믿고 죽는 이와 그렇지 않는 이의 마지막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가고, 후자는 ‘담배나 한대 피게 해주십시오’결국 그 담배도 다 피우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성공 < 건강, 야망 < 가족, 명예 < 관계 가 저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소중하지 못한 것들을 위해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온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아비멜렉의 결말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이같이’갚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갚으셨습니까? ‘깨뜨리니’라는 말의 원문은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머리가 되려고 온갖 범죄를 저질렀던 그의 머리를 박살내심으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십니다. 결론적으로 요담의 저주가 성취된 것입니다. 

 

요담의 저주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라는 저주는 세겜 망대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지른 불에 타서 몰살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세겜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문자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에게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 불이 아온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성취라기 보다는 하나의 word-play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어 불(에쉬)이라는 단어와 여인(이솨)라는 단어는 여성형 접미사를 빼고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심판할 불을 한 여인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비멜렉의 죽음을 보다 더 치욕적인 죽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본문에 중요한 ‘하나님이 갚으셨다.’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비멜렉 이야기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갚으셨다’는 표현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입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비멜렉이 야망을 품고 그토록 야비하게 정권을 잡고, 오만방자하게 정치권력을 휘둘러 왕이 되었지만, 그 땅의 궁극적인 왕은 하나님 바로 당신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관계는 관계인데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왕이시며,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왕이 되심을 인정하는 자만이 인생의 마지막 때를 영광스런 승리자로 마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가 왕이 되어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이 왕이심을 입증해 버리십니다.

 

그리스 시라쿠사에는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은 기회이다.’바로 기회라는 것이 오면 붙잡을 수는 있지만, 지나가면 결코 붙잡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위기는 ‘위기와 기회’라고 하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의 삶은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연속입니다. 이 기회가 지나가면 더이상 주님을 왕으로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생의 때가 지나가면 학생의 때에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삶은 더이상 살 수 없습니다. 청년의 때가 지나가면 청년의 때에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교회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과 은총을 듬뿍 받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것은 첫째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맷돌을 던질 기회도, 아비멜렉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인생은 두 여인에 의해서 생사가 결정된다. 첫 여인(8:31, 9:1)은 그에게 생명과 권좌를 주었고, 두번째 여인은 그에게서 이 둘을 앗아 갔다. (9:53)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은 사람이 앗아 가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여러분의 복은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여러분의 현재의 축복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 순간순간이 마지막 때라고 생각됩니다. 기회라는 것이 다시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청년들이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 여러분들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다시 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것은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라도 내가 주님 앞에 설 것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말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늘 믿음으로 굳게 서서 헛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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