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세상 속에서(영적 타락  도덕적 타락) (사사기 19 16-30)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1:1-3:6 말씀은 사사시대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배경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3:7-16장까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을 통한 회복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17-21장까지는 사사시대의 상황 즉 그들의 타락이 어떤 타락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17-18장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보여주고, 19-21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타락을 보여줍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19장에서는 레위인의 타락과 베냐민 족속의 타락을 보여줍니다.

   오늘 19장의 하반부를 보시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가 본문에 나오는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실 때 이런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친절한 노인과의 만남(16-21)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9:16) 

   원문은 “그런데 보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잠시 여기서 체류하는 중이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구르라는 단어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임시적으로 체류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류했고, 룻기에서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가서 거류했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류했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노인에게는 나그네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도 나그네처럼 여기에 머물고 있으니 나그네의 설움과 고통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은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19: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눈을 들어”라는 표현도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나그네라는 것을 알고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읍에서 유일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나그네가 있는 것이 보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눈을 들면 보이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기만 하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정말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피기 시작하면 우리의 사명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나그네를 본 노인은 그에게 질문합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이렇게 질문을 던진 목적은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해 다가가고, 그를 돕기 위해 가까이 나아가는 그런 관심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18) 

   이제 나그네가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곳 사람입니다.” 아마 노인은 에브라임 산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우연히 같은 지역 출신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집은 에브라임 산지 근처 실로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아마 너무 늦게 출발하여 안식일이 다가오니까 집보다 먼저 성막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가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내가 서울 사람인데 지금 청와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러면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를 영접하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19:19) 

   그들에게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 여행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짐승들의 먹이와 자기들이 먹을 양식을 직접 챙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상대방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관심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혹시 이 노인마저 영접하지 않으면 큰일이기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19:20) 

   여기까지 들은 노인은 “그대는 안심하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노인이 보기에 그 레위인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챙기고 온 양식과 먹이는 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어쨌든, 확실히”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히 말하지만 거리에서는 유숙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기브아의 밤거리는 굉장히 위험한 밤거리이며 안전을 책임 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밤거리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기브아도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단지 오늘밤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게 평소 그들의 삶인 것을 이걸 노인이 잘 알았기 때문에 절대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19:21) 

   이제 그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나귀에게 먹이를 먹이고, 발을 씻고 먹고 마시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22절에는 “그들의 마음이 즐거웠다”고 말씀합니다. 길거리에서 불안감에 떨던 그들에게 평강과 행복이 찾아온 것입니다. 모두 친절한 한 노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아무도 나를 영접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를 영접하는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풍성하게 누려야 할 축복이 바로 이런 만남의 축복입니다. 특히 힘든 시절을 만났을 때 만남의 축복이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만남의 축복을 통해 그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만남으로, 룻은 보아스를 만남으로, 다윗은 요나단을 만남으로, 바울은 바나바를 만남으로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교사를 만나고,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 우리의 인생은 정말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힘든 사람들,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만나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본문의 노인처럼 눈을 들어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체질이 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22-26)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19:22) 

   불행 중 다행으로 친절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의 집도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다음에 원문은 또 “보라”로 시작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을 만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들 두들기며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불량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알의 자식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에는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병에 걸린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아느쉐”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원문에는 “아느쉐”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합하면 도저히 가망이 없는 악에 물든 인간인 불량배들 그 인간들이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떼로 몰려오면 답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또 어디에 있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냐민 땅 기브아는 하나님이 너무 악해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버렸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결국 성적인 타락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문화가 건전한 사회는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19:23) 

   그런데 이 노인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악행이라는 말은 “사악한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노인은 그들이 하려는 짓이 사악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런 짓을 하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망령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망령된 일이란 “어리석고 무분별한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무리 범죄의 소굴과 같은 곳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의 집에 집단으로 몰려가서 집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어 성폭행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인이 가진 도덕적 기준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행이 아니라, 단지 내 집 손님이기 때문에 악행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내 집 손님이 아니었다면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무리는 그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런 돌발사태가 벌어집니다. 레위인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버린 것입니다. 원문의 뜻은 그 레위인이 자기 첩을 강제로 끌고 가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안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첩을 억지로 끌어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 레위인은 상당히 비겁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5에 보면 이때 레위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자기가 살기 위해 아내를 그처럼 잔인하게 희생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떻게 했습니까? 27절에 보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런 남자 만나면 평생 고생입니다. 평소에는 조금 무뚝뚝한 남편이라도 위기 때에 목숨을 걸고 아내를 지키는 사람이 진짜 남편입니다.  5:25에 남편의 의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목숨을 버리셨듯이, 남편도 아내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토록 남자를 원했던 기브아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에 대해 요세푸스는 그녀가 기가 막히게 요염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관계했다는 말은 성관계를 의미하며, 능욕했다는 말은 성적인 학대행위를 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밤새도록 이런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19:26) 

   동틀 때에 그 여인은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 날이 밝을 때까지 그렇게 엎드려져 있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이 남편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문만 열어봤어도 살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여인의 죽음은 남편의 무관심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집까지 겨우 왔는데 여기에서 아무도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외롭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던 안타까운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한 남편의 무관심이 불쌍한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를 사지로 몰아넣고 생사 여부도 확인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혹시 오다가 중간에 쓰러지지 않았을까 나와서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읽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기를 원하실까요? 기브아 사람들의 악한 모습 앞에서 이 노인과 레위인의 대처방법에 대해 묵상해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모두 문제 해결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진정되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끊어버리고 자기만의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 노인과 레위인 남편이 망각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딸 보다, 아내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가정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물론 힘든 상황이고, 쉽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의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인터넷 뉴스를 읽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LAT(Live Apart Together)족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긴 하지만 서로 따로 지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로가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함께 지내기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서로 간섭하기도 싫고, 간섭 받기도 싫어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따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하는 것도 싫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가족들이 함께 만나서 뭉치기도 하고 자식들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브레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입니다. 19세기 작곡가 쇼팽과 20세기 철학자 샤르트르 등도 이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영국에서는 이런 LAT족이 약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뉴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혹시 나도 능력만 된다면 저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부부 사이에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는 가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서로 떨어져서 마음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들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나의 이기적인 욕심과 야망을 위해 가정을 쉽게 포기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나의 사생활보다도, 나의 꿈보다도, 나의 사회 활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나의 가정을 지키며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이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이것을 희생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변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명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혼율이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고, 패륜적인 범죄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진정한 사랑으로 세워진 가정을 보여주고 참된 행복과 가치가 여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참된 가정을 세우고 진정한 공동체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악행에 악으로 대항하는 레위인(27-30)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19:27) 

   이 사람의 모습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일찍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와는 상관없이 그냥 떠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녀를 찾을 생각도 없었고, 생사여부를 확인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빨리 이런 위험한 곳을 빠져나가야 되겠다는 그 한 가지 생각만 한 것입니다.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19:28) 

   이 남편이 또 말하는 것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오로지 길을 떠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이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보통 고속도로를 타고 먼 길을 떠날 때 여성들은 휴게소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이렇게 가고 싶은데, 남성들은 오로지 시간기록을 깨는 데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죽도록 고생하고 문 앞에서 엎드려져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아내를 붙잡고 통곡이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쓰럽지 않습니까? 나 때문에 처참하게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겨우 한다는 말이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이었습니다. 

   남편 분들 중에 혹시 힘들게 일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잠을 자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신 적 있습니까? 혹시 항상 먼저 잠을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제가 알고 있는 분들 중에는 대부분 이런 경험들이 다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보통 남편들의 생각입니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정말 아내의 수고에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편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미안한 생각은 고사하고, 조금의 관심도 없었으면서, 엎드려져 있는 아내를 빨리 떠나야 되는데 뭐하고 있느냐는 식으로 무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 현장에 있었으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이야 말로 정말 통곡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걸 통해 자기가 당한 것을 보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19:29) 

   그는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12덩이로 나눠서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피투성이 소포를 12지파에게 하나씩 택배로 보낸 것입니다. 당시 택배 사업이 활발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사람이 이걸 들고 전국으로 퍼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왜 이렇게 할까요? 아내의 죽음에 대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 기브아에서 자기가 당한 그 모욕을 갚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잔인하게 복수를 해야 하는데 첩의 죽음을 보니 딱 그 방법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첩의 죽음을 통해 자기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첩의 시체를 토막토막을 내어서 12지파로 보낸 것입니다. 이게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살았던 첩인데 장례만이라도 제대로 치러줘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직 잔인하게 복수하기 위해 가장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첩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오열을 했다든지 눈물을 흘렸다든지 이런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녀의 죽음이 오히려 자기 복수에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겠다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오직 복수심에 불타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윤리도 도덕도 다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19:30) 

   이것을 본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로 이런 끔찍한 만행은 일어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20:1 이하를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서 총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베냐민 족속이 거의 전멸할 때까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가 원하던 대로 철저하게 보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레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인륜을 저버리고, 양심을 짓밟아버리고, 도덕을 무시하는 수준의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도둑질도, 사기행각도, 중상모략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런 짓을 하면서 레위인은 정의감에 불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악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폭력으로 나오면 폭력으로 맞서고, 정치적으로 나오면 정치적으로 맞서고, 힘으로 나오면 힘으로 받아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보안 시스템을 새로 설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온 것입니다. 당연히 보안 시스템이 작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안 시스템 회사에서 교회로 전화가 온 것입니다. 지금 도둑이 교회에 침입했으니까 나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출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더러 나가보라는 말입니다. 도둑이 들었는데 보안 시스템에서는 출동하지 않으니 목사님이 할 수 없이 나가보았다고 합니다. 

   나가보니 창문을 뚫고 도둑이 막 들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도둑을 잘 타일러서 그냥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만약 교회가 아니라 일반회사였다면 그 보안직원이 이런 식으로 나왔을까요?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니까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교회니까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이 악하게 나온다고 해서 교회도 악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런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악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악한 일로 갚아야 한다는 사회정의감에만 불타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고 베냐민 지파는 씨가 말라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면 결과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모두가 악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렸지만 형들을 보살폈던 요셉처럼,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인정하며 끝까지 존대했던 다윗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묵상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첫째 아무리 악한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며, 만남의 축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정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정한 가정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세상이 악하게 나와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여러분의 삶은 빛나는 보석과 같은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세상은 놀라며, 하나님의 나라는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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