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가로 채지 말라 ( 7:24-8:3)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에 쾌히 응하고 모여서 요단 나루턱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에브라임은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체포할 수 있었다. 오렙은 “까마귀”라는 의미이며, 스엡은 “이리”라는 뜻의 이름다. 까마귀와 이리, 미디안인들 같은 유목민들에게는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정처없이 날아다니는 까마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사냥하는 이리처럼 살아온 두 미디안 방백의 운명은 에브라임들의 포로가 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기드온의 이야기는 삿 6:11에서는 포도주 틀뒤에서 숨어 있는 기드온으로 시작하지만, 미디안의 이야기는 포도주 틀 위에서 적군을 제거하는 장면으로 종결된다. 이처럼 동일한 삶의 현장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생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6:12처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의 현장 포도주 틀 뒤에서 세상의 기세에 눌려서, 경제한파에 눌러셔, 물질적 어려움에 눌려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눌려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제 일어서십시오. 당당하게 일어서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삶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의기양양한 에브라임-왕자병,공주병에 걸린 크리스챤]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과 기드온 전쟁에서 마지막 순간에 참여했으나 큰 전과를 올렸다. 미디안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체호하는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고대인들의 전쟁풍습에 따라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전승을 축하하는 트로피로 적장들의 머리를 가지고 기드온에게 나아왔다. 이때 기드온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미디안을 추격하는데 열중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전과는 순전히 그들의 공만은 아니었다. 이미 미디안 군대는 용사이신 여호와에 의해 격파되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지리멸절 직전에 모인 패잔병들이었다. 

 

에브라임은 먼저 하나님께 공을 돌렸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삿 7:2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에브라임 지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8:1을 보십시오. 

 

에브라임 지파는 단지 불만을 표시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에게 심하게 대들었습니다. 1절에 ‘다투는지라’는 전쟁을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 이것이 그렇게까지 할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시기심때문에 세상에 우스운 꺼리를 만드는 사람을 많이 보게됩니다. 시기심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비판이 항상 그렇듯이 에브라임 지파도 기드온이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기드온에게는 전쟁에 누굴 데려가고 누굴 남겨 놓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300명을 따로 선별하시고 나서 그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라고 해서 기드온은 그저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항상 대우를 받으려는 경향이 큰, 자존심이 센 지파였습니다. 기드온에 속한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요셉의 후손으로서 서로가 우월감을 가지고 경쟁 관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 48:19) 즉 므낫세는 장자라는 권리를 내세웠으며 에브라임은 야곱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자파에 속한 기드온이 사사가 되어 큰 업적을 세우게 되자 에브라임은 자기들이 므낫세에 뒤진다고 생각하여 몹시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미디안과의 전투 초기에 에브라임을 참전토록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들을 더욱 분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삿 6:34-35절에 이미 기드온은 모든 지파들이 동참하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큰 지파 중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는 그들을 외면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시기심으로 가득)

 

8:1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리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됨이냐?”그랬던 그 에브라임 사람들이 12장에서는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또 시비를 합니다. 12:1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쯤 되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선 인격 장애집단'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얘기 다르고 승리했을 때 애기가 다른것이지요. 번번이 위험과 위기가 다가올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이기고 돌아오면 "왜 불러주지 않았느냐?"며 시비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일까요? 한 말 안했다고 하고, 안 한말 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그 분노를 온유한 대답으로 극복했어요.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렇게 겸손으로 나아가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한다.”실제 내면에서 우러 나오는 지혜와 겸손의 말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사실 시편 78편에도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이미 그들은 지파가운데서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지파 중에 가장 큰 지파이고, 병기와 활을 가져 전쟁에서도 가장 도움이 될만한 지파였지만 실제적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입다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어요. 

 

4절에서 입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우자" 에브라임과 길르앗이 싸운 결과 에브라임이 대패를 했습니다. 7 - 8만명으로 추산되는 에브라임 지파 중에 무려 42,0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시기심으로 동족을 괴롭히는 이 지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심판,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필요할 때 협력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이나 입다는 암몬이나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자기의 동료요 이웃인 지파들을 불렀습니다. 여선지 드보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전쟁에 동참할 형제들을 불렀지만 많은 지파들이 외면했었습니다. 강가나 산 위에서 피리를 불며 구경만 하는 지파도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어느 지파보다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힘도 주셨습니다. 권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받은 축복에 비례해서 헌신하지 못했어요. 

 

이 에브라임 지파는 12지파 중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가장 힘이 있는 지파, 숫자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모든 것이 복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른 지파가 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헌신의 자리에는 언제나 빠져나갔어요. 

 

여러분 머리 속에 "아무개 집사가 그 주인공이야" 이렇게 생각이 된다면 오늘 설교는 헛한 것입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내가 그랬지" 은혜는 남들보다 갑절을 받았는데 언제나 빠져나가려고 했던 나,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되면 오늘 여러분은 수지맞은 거예요. 에브라임 지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의 중심에 있었는데 희생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어요. ( 48:19)

 

교회가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할 일은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 영적 전쟁에서의 싸움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사탄, 마귀는 우리의 대상인데 싸움의 대상인데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성경은 그 사탄의 상태를 우는 사자와 같다고 했고, 삼킬 자를 찾아 헤맨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킬 자의 대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늘 졸고 있는 사람, 이건 삼킬 자의 대상 아니겠어요?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의 자리에 없는 사람, 헌신해야 하고 충성하고 땀 흘려야 할 자리에 언제나 빠지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절벽 끝자락에 서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 사람은 두 손으로 밀 것도 없어요. 손가락 하나로 툭 치면 떨어지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영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탄 마귀가 찾을 자는 바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에브라임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이 가로채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타락의 지금 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은 예배의 자리, 희생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눈물의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이 도우심을 믿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셨으므로 우리가 승리했다고 고백하는 평안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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