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의 진정한 의미 ( 6:11-24)

 

환난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그들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상기시키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할 사사 기드온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말씀을 주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며, 다음으로 구원자를 세우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6:6 부르짓더라. 4:26. 4:16 가인이 놋땅에 거함(:방황)

 

1)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임함(11-12)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6:11)

 

이제 본문은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하여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소명을 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치 나그네처럼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 몰래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밀은 타작마당과 같은 큰 장소에서 황소를 끌고 다니며 타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주틀과 같은 작은 기계로는 소량의 곡식을 타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6:12).

 

   본문 12절에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 사자는 첫눈에 기드온을 큰 용사로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강한 용사로 만들어보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를 처음 보셨던 예수님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1:42)." 4:19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약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셨고 이 장점을 통해 큰 일군으로 사용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 될 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성질이 급하고, 단순하고, 실수가 많은 아슬아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가 될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을 만나면, 그 약점을 극복하고 강점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임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점에 묶여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충분히 살려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땅굴이나 파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기드온에게 주님은 “큰 용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큰 용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당황이 되십니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이러한 부르심이 부담스러우십니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이 가진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큰 용사로 불러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게 부족함이 있더라고, 연약함이 있더라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의 길을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기드온의 첫 번째 의문 제기와 대답(13-14)

 

   자기를 향해 큰 용사라고 하는 말을 들은 기드온은 즉각 이의를 제기합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6:13).

 

 지금까지 사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 중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생명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드온이 여호와의 부르심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의문은 “정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에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이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이 모든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만약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만약 함께 계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미디안에게 이런 압제를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기드온의 이런 항변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마치 당연하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일 뿐 아니라 우리를 버리신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고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은 기드온 자신의 영안이 어두워서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는 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미디안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이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는 그런 민족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닥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해서 교회가 타락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우리 민족이 이처럼 몰락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순서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문제입니다. 다짜고짜 먼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셔야만 한다는 식으로 당돌하게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본문 14절에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시며 다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기드온이 말할 때 돌아서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한 말을 주님께서는 제대로 듣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을 가치가 없어서 들을 필요성을 못느끼는 말이었기 때문에 듣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도 그런 기도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기도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기도는 별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져도,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하셔서 역사하실 것을 믿는 사람은 적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는 들을 가치가 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돌아보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안들었다. 다시 말해봐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어떤 대답을 주십니까?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본문을 잘 보시면 기드온이 의문을 제시한 것에 대한 답이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네가 부르심에 순종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사사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계십니다.

 

의사 소통이 전혀 안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와 인간의 관심이 다르면 이렇게 됩니다. 기드온은 자기 민족의 문제만 해결되고, 환경만 개선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다시 경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과 하나님의 첫 번째 대화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자세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요구하는 자세를 가질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말만 했고 자기 생각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드온의 요구를 일거에 묵살해버리시고 당신의 뜻을 다시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3) 기드온의 두 번째 의문 제기와 대답(15-16)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6:15).

 

이 말은 미디안을 쳐부수는 것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조금 전에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힘을 의지하고” 나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기드온이 가진 개인의 힘을 의지하고 가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원문의 뜻은 “네가 가진 힘으로 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네게는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강한 용사, 큰 용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자기의 현재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15절에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나이까?

 

아직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능력보다는 자기의 조건과 현실의 모습에 근거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나의 집은 약하고 나는 작은 자이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대답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경과 조건을 따지며 사명에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처음에 그랬습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왜 나를 보내시려고 하나요?”아브라함도 그랬다.(아들 이삭) 빌립도 그랬다.(오병이어사건) 믿음은 beyond our current situations

 

이때 16절에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행하신다,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6:16).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우리도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약속을 받고 확신할 때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분명할 때 우리에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때 진정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장 말씀을 기억하라(반드시 읽고 넘어 갈 것)..나 약해있을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찬양)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지 바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때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표적을 구한 기드온에게 불로 응답하심(17-24)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6:17).

 

우리 중에는 말씀만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신앙의 체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체험을 통해 보다 확신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지식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우리의 삶을 거듭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역사해야 합니다. 그때 참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6:18).

 

기드온이 내가 다시 예물을 가지고 주께로 와서 드릴 때까지 떠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18절 말씀은 하나님을 찾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참되게 경배할 때 인간은 뜨겁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6:19).

 

19절에는 기드온이 정성껏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어려운 때에 어디서 구했는지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가루 한 에바로 무교 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6:20-21).”“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6:22).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기드온은 이제 절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죽는다는 것이 당시 보통 사람의 경건이었다. 이사야도 그랬다. 오늘날 이런 경외심은 사라진지 오래다.“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 중에도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세상의 재미있는 인생이 끝나고 고달픈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그때부터 즐길 수 있는 세상 쾌락을 다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아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일부러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만난다고 죽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그때 기드온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6:23-24).

 

여러분! 하나님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불행해지고 죽어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삶이 얼마나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보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죄 받지 않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지금 하나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내가 좀 더 늦게 하나님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준 000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고백을 나오게 되어있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면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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