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구원과 또 다른 범죄( 2:16-23)

 

지금 우리는 사사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셨고, 많은 자손들을 주셨고, 복을 주셔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신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보내신 것은 잘 먹고, 편안하게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1]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타락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들을 몰아내고 끝까지 싸워서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축복받은 땅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약의 표현으로는 우리의 심령에 세상의 것을 온전히 몰아내고 주님으로 가득채우라는 것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찬양)

 

그런데 그들은 비전을 가지고 침투하여 그 땅을 고치는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과 타협하고 우상[2]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에 물든 땅을 치료하기보다는 도리어 그들과 동화되어서 그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저주받을 백성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죄악에 물든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길 원하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을 통해 죄악에 물든 이 땅을 치료하고 회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성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세상과 타협하고 그들 앞에서 신앙양심을 팔아버리는 짓을 일삼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구원: 사사들을 세우심(16-18)

 

첫 시간에 저는 사사 시대의 양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범죄(11-13) → 징계(14-15) → 사사를 통한 구원(16-18) → 또 다른 범죄(19)” 이것이 반복되다가 결국 20절 이하부터 언약을 어긴 결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6절 이하부터 사사를 세우시고 여호와께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장면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3]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2:16).

 

본문은 징계 후에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사사라는 말은 재판자 혹은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들은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군대와 정치와 사법을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혼탁한 시대에 잠들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웠던 부흥의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서 섬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히브리어의 의미는 오른손이 불구)였고, 바락은 겁쟁이였고, 기드온은 의심이 많았고, 삼손은 여자에게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을 보니까 이들은 모두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칭찬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부족했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앞장섰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회복과 부흥을 위해 헌신했던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핑계 삼지 마시고, 하나님의 능한 손에 붙들려 쓰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사 시대를 깨우는 일에 쓰임 받고,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사사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에게서 그들은 건져내게 하셨습니다(16). 이것은 사사기가 단순히 범죄 한 백성들을 징계하는 하나님만을 보여주는 성경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사사기는 타락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백성들은 자기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먼저 돌아와서 손을 내미시는 분은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사의 말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2:17).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오셔서 하신 말씀도 듣지 않았는데 인간 사사들의 말을 들을 리가 있었을까요? 마치 오늘날 믿음의 후 세대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완악한 마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럴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진리를 외치고 사랑으로 품는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נחם[4]](2:18)

 

18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그 원인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이다.”돌이키셨다는 것은 낰함은 현상을 보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바로 어두운 그들의 죄악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의 말도 청종치 않고 더욱 패역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들이 힘들어할 때에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되찾으면 그들이 다시 우상으로 돌아설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의 고통과 탄식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인 것입니다. 백성들의 온전한 회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슬피 부르짖음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려는 의도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3:2).

   

하지만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사가 죽은 후에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19).이들의 삶을 보면 마치 사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떠나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전의 모습과 삶으로 금방 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범죄(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5]מַעֲלָל]와 패역한[[6]קָשֶׁה]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2:19).

 

이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부터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징계의 원인이 무엇이며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사사가 죽은 후에는 전보다 더 타락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타락의 정도가 더욱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징계를 통해 교훈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또한 징계를 통해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풍요를 보장하는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본문에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신앙교육에는 실패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미 사사기 2:10에서 다음 세대에 하나님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함으로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를 통해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 교육을 등한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3세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교육에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보고서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세대였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잠시 하나님께 돌아와서 문제 해결만 받고 다시 등을 돌려버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시적인 도움만 받을 뿐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9절 마지막 부분에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패역한 삶을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패역한 삶을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와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아무리 정지하려고 해도 멈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군에 있을 때 저는 3주 동안 특별 내무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때 담배도 못 피우고, 종교 활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때 골초들은 금단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의 사람이 미쳐버릴 지경이 됩니다. 이때 저는 그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교관들이 피우다 버린 꽁초를 뒤져서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의 자녀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기뻐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께 등 돌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밖에는 없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비참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수 있고,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갈 수 있는 영성은 그냥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훈련과 교육을 통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신실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 축복으로 죄악에 물든 이 땅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언약을 어긴 결과(20-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7]שָׁמַע] 아니하였은즉 (2:20).

 

본문을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죄악 된 삶을 떠나지 못하고 거기서 허우적거린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 된 길은 빨리 떠나야 합니다. 본문은 이들이 진노를 당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나와 세운 언약을 어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먼저 나와 세운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언약을 맺었습니까? 여호수아 24:15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이때 백성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16절입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24:16).

 

그리고 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24:20).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에 반드시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언약입니다.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이 땅에서 여전히 내 맘대로, 내 고집대로 살고 싶어하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악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전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구원의 성격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내가 입술로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삶은 엉망이 되더라고 된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이제부터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간섭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14:23) 이게 분명할 때 여러분들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2:21).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고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내리신 조처는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열국들을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떠나지 않으면 죄의 열매를 반드시 먹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행했을 때 그는 용서는 받았지만,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죽었고, 압살롭의 반역으로 맨발로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도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떠나지 않으면 죄의 대가를 눈으로 보고, 경험하게 하심으로, 깨닫고 죄를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수많은 대적들이 득실거리는 땅에서 살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횡포를 보면서 그들의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2:22-23).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마 위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면 주변 열국들을 정복하며 살아갈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떠나면 어김없이 열국들이 침입하여 그들의 재산과 안식을 빼앗아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그 도에 행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떠난 삶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 안식을 빼앗긴 삶을 살아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깨어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주변에 문제를 남겨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틈만 생겨도 딴 생각을 품고 하나님을 떠나기가 쉬운 죄인들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이 늘 깨어서 하나님을 찾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문제를 남겨두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의 끈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 붙잡고 사니까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1]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6:11 하나님의 전신갑주(πανοπλία)를 입으라(νδύω) 13절에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ναλαμβάνω).

[2] What is the idol?  32 우리를 위하여before us, for us 나는 위한 것이 우상[pecel]이다. 

[3]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야 한다. ^^

[4] 슬퍼하다. 애통하다.  6:6에도 동일한 단어가 쓰임 (슬픔이나 동정을 나타냄),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보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 뜻을 변개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5] Abuse 상태이다. Mock(나쁜 의미로 따라서 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은 가나안 땅의 우상을 따라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abuse하는 것이었다. 즉 상대를 조롱하면서 그가 싫어하는 것을 따라사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하나님의 심정을 ^^

[6] 목이 곧은 교만한 상태, 남의 도움이 혼자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 조언과 지혜를 거부하는 상태, 버리다는 상태와 동일하다. 조언을 거부하는 상태..말씀을 거부하는 상태

[7]  6:4 “들으라 이스라엘아”와 동일한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들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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