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기 전에 (사사기 19 1-15)

 

 

더취 시트라는 분이 쓴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책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큰 불행한 일 중에 하나가 1271년에 일어났다고 시작합니다. 

  니콜 폴로와 마테오 폴로(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손)는 당시 중국, 인도, 그리고 모든 동방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던 쿠빌라이 칸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쿠빌라이 칸은 징기스칸의 손자입니다. 그때 그는 니콜과 마테오가 말하는 기독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가서 이 종교에 정통한 사람 100명을 나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하시오. 그러면 내가 세례를 받을 것이오. 그땐 나 뿐 아니라 모든 고관들과 용사들 그리고 그들의 신하들까지 다 함께 세례를 받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들 나라보다 여기에 더 많은 기독교인이 있게 될 것이오. 

   하지만 그 후로 30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30년 후에 두세 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너무 적은 숫자였고 이미 늦은 때였다고 합니다. 만약 13세기 그때에 중국이 완전히 기독교화가 되고 동방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현재의 모습은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처럼 기회를 놓쳐버리는 일이 우리 시대에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늦게까지 머뭇거리다가 갈 때까지 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때에 타이밍을 맞추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레위 가정의 타락(1-2)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19:1) 

   본문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의 특징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그때에는 왕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없을 때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기강과 도덕적인 기강이 무너져있던 시대였습니다. 17-18장의 영적타락 뿐 아니라, 19장 이하의 도덕적인 타락 역시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류한다는 말은 잠깐 동안 체류한다는 뜻입니다. 본래 레위인은 하나님이 정착하라고 주신 48개의 성읍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정착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나그네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첩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정식 아내를 아내, 둘째 아내, 그리고 첩으로 구분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칙을 버리고 일부다처제를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인은 당시 신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도덕성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욱 성결하게 지켜야 할 레위인이 오히려 자기를 더럽히고 첩을 취함으로 악한 모범을 보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모습은 겉모습은 성직자였지만 사생활은 문란한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가 최근에 개봉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교황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겉으로 볼 때에는 이 사람만큼 교황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이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때 그가 지금까지 꾸며왔던 거짓된 삶들이 폭로가 되면서, 그는 기름을 자기에게 끼얹고 자살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마 그 영화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가 바로 종교지도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같아 보였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 영화의 마지막을 보기 전까지는 그 신부의 헌신된 모습에 감동을 받아 눈물까지 흘리면서 보았습니다. 정말 신앙의 지도자는 저런 헌신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면서 다음에 설교할 때 꼭 저 예화를 써야 되겠다고 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릅니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19:2)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본문에 그 첩이 행음했다고 말씀합니다. 그 첩이 얌전히 가정을 지키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음했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직업적인 매춘행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계속적으로 이런 음란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각이 된 모양입니다. 그는 이 이로 남편을 떠나 고향 아버지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남편을 떠났다는 말은 등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성은 다른 남자와 쉽게 관계를 맺고, 남편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여자가 주도적으로 남편을 버리고 도망간 사례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적 윤리도 무너지고 가장의 권위도 실추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집에 가서 넉 달 동안을 지냈다고 합니다. 만약 당시 율법 정신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기 싫어서 그녀가 급히 도망갔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율법정신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도망갈 수 있었고 또 아버지는 그녀를 받아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레위인에게 있어 첩을 얻은 것보다 더 큰 도덕적인 타격이었습니다. 만약 나중에 그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청문회를 연다면 이런 것들이 전부 청문회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 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절 이하에 보면 그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을 자기스스로 다시 찾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이때 그가 하늘을 보고 회개하고 기도했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길을 열어주셨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호세아 선지자가 음행하고 떠난 고멜을 데려오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진짜 아내였고, 지금 이 레위인에게는 첩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데려와야 할 문제가 아니라, 청산해야 할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찾아가 문제를 크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환경과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생각하고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붙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느낌이 들 때 회개하고 정신 차리고 바르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늦어버리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얼마나 방황하고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까? 하지만 그는 어느 날 담장 너머로 들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 그때 그는 성경을 집었고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그때 읽은 구절이 롬 13:13-14 말씀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3-14). 

2) 회복에 대한 어리석은 시도(3-9)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19:3) 

   레위 사람은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기 위해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녀에게 갔습니다. 원문은 “말하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이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데려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다정하게 말하고”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른 방법일까요? 행음하고 가정을 버리고 떠난 여성을 다정하게 말하고 데려온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그를 책망하거나 바로 잡으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를 바로잡은 흔적이 없고, 그녀의 남편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잘 구슬려 다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자는 말입니다. 레위인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가르쳐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전혀 율법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욕망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보자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합니다. 아마 그녀의 아버지는 4달 동안 딸을 데리고 있으면서 속이 탔을 것입니다. 이걸 살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고 정말 골치가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시 찾아온 것을 보고 이제 돌려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그는 어쨌든 딸과 결별한 사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19:4) 

   그녀의 아버지를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그녀가 정식 아내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 “그 여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나이어린 소녀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머물게 하니까 그가 3일 동안 함께 머물었습니다. 머물게 했다는 말은 강하게 붙들었다는 말입니다. 절대 그냥 떠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붙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했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는 와우계속법을 사용하여 그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재결합을 축하하면서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그들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사위도 조금도 장인이나 첩의 잘못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어쨌든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인 다운 회복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며 기분을 풀고 그렇게 세상적인 화해 방법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19:5-6) 

   이제 5절부터는 장인의 집에 4 5일 동안을 머물며 먹고 마시는 잔치에 대해 지루하고 반복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일의 잔치가 다 끝나고 이제 일어나 돌아가려고 했는데 장인은 떡을 조금 먹고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 이 밤을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유숙한다는 말은 밤을 지낸다는 뜻으로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루 밤 더 즐기고 가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미 밤도 되었고 아직 안식일이 되려면 멀었고 해서 그 사람이 다시 유숙합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19:7) 

   가능하면 최대한 오랫동안 사위를 머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딸의 죄는 남편 마음먹기에 따라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사위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레위인의 입장에서는 이게 순종해야 할 간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빨리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언제 무슨 말을 듣던지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유혹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했다고 말씀합니다.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19:8) 

   이제 다섯째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아버지가 또 사위를 붙잡았습니다.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고 강청합니다. 결국 그는 또 붙잡혀서 날이 저물어가도록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늦어서 안 될 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9:9)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은 또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이 밤도 유숙하라고 꼬드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친절이었습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목적지에 충분히 도착했을 것이고, 적어도 기브아에서 그런 어려움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야 할 것은 늦기 전에 벗어나야 할 자리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머뭇머뭇 거리다가 더 큰 불행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간 중간에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 우리가 정신차리고 벗어난다면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리면 다시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노래” 152장에 보시면 “너무 멀리 왔나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왔나요 주님께 돌아가기엔    사랑의 주님 그 품을 떠나 내 영혼 잃어버린 지금    너무 늦은 건가요 내 영혼 회복하기엔 

   수많은 죄악 속에 갇혀서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너무 멀리 떠나버려서, 너무 늦어버려서 내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리고,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선 안 된다고 다짐을 하고 결단을 해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멀리 와 버렸고, 너무 늦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노래를 계속 보시면 이렇게 진행합니다.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나의 손을 잡아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다시 주의 임재 가운데 내 영혼 살 수 있도록 

   아무리 멀리 떠났어도,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어도, 우리가 회복을 갈망하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것이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며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없다고 생각될 때일수록 더 가까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늦었다고 생각하면 포기해버리는 시대입니다. 가장이 가족과 삶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자식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심지어 나라의 수장까지 지냈던 분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너무 늦은 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하고 주님께로 달려가기만 하면 탕자를 기다리셨던 주님께서 우리도 영접하실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빨리 내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회복이 난관에 부딪힘(10-15)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9:10) 

   그 사람이 이제는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문에 “일어나서, 떠나, 이르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은 그가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아마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18절에 노인에게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렇게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떠나지 않으면 안식일 봉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고 계속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에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고 말할 때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여선지 드보라가 삿 5:6에 고백한 대로 그때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위험한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낮에도 이처럼 위험한데 밤에 여행길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함께 한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한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일찍 떠나든지 아니면 다음 날 떠나든지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고집을 부리며 늦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부스라는 성읍에 도착했습니다. 여부스는 다윗이 점령하기 전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9:11) 

   여부스에 도착했을 때에 해가 지려고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사막과 같은 광야라 밤이 되면 여행이 불가능합니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 밤에 차에서 내려 잠시 걸어보았는데, 그때 가이드 말이 눈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 광야라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 불기둥이 아니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종이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 유숙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본문에 “우리가 돌이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빗나가다는 뜻으로 본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2절에 주인도 “우리가 돌이켜”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볼 때, 이방인의 성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빗나간 행동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9:12) 

   이때 주인은 “우리가 돌이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기브아로 갈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가능한 이방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거기서 북쪽 5km 정도 떨어진 기브아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9:13) 

   아마 이 말을 듣고 종들이 조금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시 한 번 더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고 지시합니다. 뭔가 이방인과 접촉하지 않으려는 거룩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입니다. 첩을 취할 때에는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들과의 접촉은 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첩을 취한 종교인이 겉으로는 위선적으로 깨끗한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음란한 생각을 하고, 사기행각을 벌이고, 탈세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속으로는 온갖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십일조를 내고, 금식을 하고, 손을 들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잔과 대접을 다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3).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9:14) 

   결국 주인의 고집 때문에 모든 일행은 다시 출발하여 결국 베냐민 지방에 있는 기브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도착하니 해가 졌다고 말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들이 도착할 때 해가 졌다는 표현은 간접적으로 기브아의 영적상황이 이처럼 어두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19:15)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혹시나 그들을 영접하는 자가 있을까 싶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곳은 성문 근처에 있는 넓은 공터를 가리킵니다. 당시 성문에서 재판이 이뤄진다고 할 때 이곳에서 재판이 이뤄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보고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지 인심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을 영접하면 그날 밤에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성문 앞 광장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처량하게 앉아 있는 이 레위인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어서 자기를 집으로 영접해주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막내가 이런 말을 많이 썼습니다. “난감하군” 아이들이 많이 보는 파워레인저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말입니다. 너무 늦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버린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운이의 병을 고치시고 그 가정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뉴질랜드에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어버리면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낭패와 실망을 당하기 전에 주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늦기 전에 돌아와서 바르게 세워지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축복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레위인 가정의 도덕적인 타락을 통해 하나님 없이 살면서 갈 때까지 가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갈 때까지 가버렸습니다. 너무 늦기 전까지 빠져나와야 할 자리를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늦어버려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빠져나와야 할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너무 늦어버리면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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