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제단을 헐라 (사사기 6:25-32)

 

 

) 기드온의 순종(25-27)

 

샬롬의 하나님을 경험한 기드온이 가장 먼저 받은 사명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가 샬롬의 하나님을 경험하던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첫 번째 지시를 전달합니다.

 

   “이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6:25).

 

“이 날 밤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샬롬의 하나님을 경험한 바로 그 날 저녁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밤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의 영적인 측면에서는 암흑기라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3장에 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가 누구인지 안다. 1장의 빛과 어둠을 보라.

 

그렇다면 그 임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의 단을 헐고 대신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처럼 갑작스러운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급하게 일을 처리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첫 임무가 어떤 성격을 띠느냐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가정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과 그 곁의 아세라 상”이라는 표현은 그의 가문이 우상숭배하는 가문이었음을 보여줍니다.[아브라함도 그랬다. 신앙생활의 첫 출발은 분리로 시작된다. 본토 친적 아비의 집과의 분리] 이것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걸림돌부터 제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시작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있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악된 습관과 불신앙의 삶을 가지고서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법입니다. 주님을 위해 뛰어다니기 이전에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우상의 제단을 헐고 그 위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 것은 기드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회복을 사모하는 백성들을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 이전에 먼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우러 나가기 이전에 우상숭배와의 전쟁을 먼저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인가?  1) 비실재 2)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정/욕망의 목표물 3)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 32:1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6:26 여호와를 위하여와 비교해 보라. 

 

하나님은 먼저 기드온 아버지 집의 수소를 잡으라고 하신다. 거기에 라카후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그 단어는 잡아 죽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이 때가 어떤 때인가? 수시로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들이 닥쳐서 이스라엘의 곡식이나 가축들을 소가 핥듯이 훑어가던 시기엿다. 그런 상황에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 소가 있었다는 것도 기적인데 그 소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는 항상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엘리야를 따라 갈 때 소를 죽이고 쟁기를 태워 버린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끊어내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 하나의 실예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도 그들이 애굽에서 섬겼던 풍요의 신인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를 모형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 소는 가족의 생계와 생명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비집의 소를 죽이라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복과 만족과 생계와 생명, 즉 인간의 구원은 소-세상의 힘이나 세상의 가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걸 죽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소가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실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소를 죽이라는 명령 속에 기도온과 그 안에 담긴 이스라엘의 육적 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 소가 칠년 째 되는 소라는 그 다음 어구에서 확인이 된다. 7년이 어디에 등장하는가 6:1 7년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여졌다. 그렇다면 7년된 수소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의 힘과 기치를 의지하고 의존하는 소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가 첫째 소가 아니고 둘째 소다. 둘째 소는 항상 첫째 소를 대신하게 되어 있다. 첫째 소가 바쳐져야 할 곳에 첫째 소가 바쳐지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 항상 그 첫째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둘째 소이다. 그 둘째 소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상징하는 것인가? 예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기드온에게 내리시는 명령을 통해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도말이 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이 회복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기드온을 통해 보여 져던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조 못하고 [레위기 26장을 어김] 이 세상의 가시적인 힘과 가치를 의존하여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본주의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의 집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를 죽이시는데 그 소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하는 7년된 수소였고 그 중에서도 둘째 수고를 잡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대신 죽음의 십자가의 복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6:26).

 

   본문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위한 단입니다. 그것은 이제 주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영광을 바알과 공유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단이 세워지기 위해 반드시 바알의 단은 무너져야 했습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기드온을 포함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께로 돌아오기 위해 바알의 단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사무엘도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기 위해 지금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중요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결코 내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왜 하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을 더 크게 볼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무런 해로운 짓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집에 부적 같은 것이 붙어 있다면 과감하게 떼어서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6:27).

 

성경은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본문에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에겐 그의 가족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읍 사람들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에게는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용감하게 감당했느냐, 아니면 두려움으로 감당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결국은 감당해내었다는 점입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떨림이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의 걸음을 내딛었고 또 완수해내었던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려움을 극복한 믿음”입니다.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경험을 원하십니까? 잊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두려움을 극복한 믿음의 순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고, 두려움이 있더라도, 망설임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다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나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연약함과 두려움을 핑계삼지 마시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담력 테스트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 큰 믿음의 용사가 되어 더 중요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일군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성읍 사람들의 반발(28-30)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6:28).

 

본문에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았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입니다. 우리가 가진 간절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들의 마음은 간절하고 갈급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주기도문을 밤새도록 외우면서 3,000번을 외우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앉으면 사도신경을 108번 외우면서 묵상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지만, 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을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6:29).

 

본문에 “서로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캐어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 열심히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수사하고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조사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지금 수사하는 목적은 다음절에 나온 대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웃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 자를 잡아 죽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이처럼 흥분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이권과 관련이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알은 농경신입니다. 농작물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섬기는 신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농작물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아무리 신앙적인 행동이라도 자기에게 경제적으로 손해를 주게 한다면 흥분하고 반감을 품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결국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대적하는 자리에 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6:30).

 

이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상의 단을 헐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나와야 할 소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사기 2:2“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레위기 26장의 말씀을 보라. 31장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의 단을 헐어버린 기드온을 당연히 죽어야 할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너진 바알의 단과 찍혀버린 아세라상을 보고서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바로 자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모르는 강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세아서 간략 설명]

 

영적 안목이 흐려지고,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이 공격받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의 성읍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기드온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를 대적하는 악한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얼굴은 사자 얼굴인데 소리를 들어보면 개처럼 “멍멍” 이런 소리가 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보기가 안됐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은 있으나, 살아가는 꼴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