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으로 사는 것 ( 13:3-7)

 

 

지금까지 사시기는 범죄 --> 징계 -->회개 -->구원 -->범죄라는 사사시대의 특징을 5번 반복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된 이 시점에 우리는 다음 레파토리인 백성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내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한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13장부터 삼손 시대가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말은 있는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압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15:11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이런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삼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예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 상태로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회개를 모를 정도로 깊은 죄악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절망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본문이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을 떠난 시대,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을 잃어버린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어둠 가운데 본문은 더욱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 자손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그 아내의 특징을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라고 설명합니다. 원문의 뜻은 뿌리 채 뽑혀 볼모의 땅처럼 완전히 불임여성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절대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원문은 절대라는 뜻이 강조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포기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에, 포기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고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 때, 그 중에 가장 열악한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할 지라도 누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까? 바로 신자, 신자에게는 희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40년 동안의 깊은 영적 어둠 상태에 있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찾으셨는데, 그 중에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절망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여인을 사용하셨을까요? 그녀가 하나님의 초점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 아니면 절대 설명이 될 수 없는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여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 일임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더 이상 희망도 없고, 더 이상 소망도 없고, 더 이상 비전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러분 ^^

그러므로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약하다면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일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나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나를 통해 반드시 일하실 것임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포기할수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런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13:3을 보십시오. 

본문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은 거의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지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하냐면 18절에 내 이름은 기묘니라라고 말했는데, 9:6에 의하면 기묘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표현한 예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2절에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경험을 가리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그녀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본래 아이들 갖지 못하는 불임 여성에게 잉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들까지 낳을 수 있다는 소식은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된 소식에는 이 여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조항도 있었습니다. 

13:4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원문에 쓰인 단어 rm;v'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녀의 임신이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동창하여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는 임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시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rm;v'라는 단어는 신명기 6:4에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lae_r"f.yI [m;Þv.' 오늘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중요하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그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4-5절을 보라. 이 명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부분은 여인에 대한 명령, 뒷부분은 태어날 아이에게 연관된 명령으로 되어 있다. 우선 여인에 대한 명령을 살펴보면 두 개의 명령과 하나의 이유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명령은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이며, 둘째 명령은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이다. 그 이유는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다. 아들을 낳을 것이기에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이를 임신하면 이런 음식을 금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이제 잉태할 아이가 특별한 아이이기 때문에 이런 음식 금지 규정을 지시한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금지하면 얼마나 좋을까!

뒷 부분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여호와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은 하나의 명령과 두 개으 이유로 나타난다. 명령은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이며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기 때문이고 둘째,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성별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6:4-6절에 그 규정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가지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아마 이런 메시지 때문에 그 부모는 삼손에게 머리에 삭도를 대어선 안된 다는 것만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삼손의 삶을 보면 포도주나 술을 예사로 마시고, 시체에 접근하는 것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유독 머리를 깎는 것만은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리킬려면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사실 삼손은 나실인이기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포도주를 마실 때에고,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능력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머리를 깎을 때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강조해서 들어왔고, 자신도 분명히 알고 있는 하나님을 명령을 어겼을 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떠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삶을 참아주시고 인자하심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끝까지 지켜야 할 정체성을 지키지 않을 때 더 이상 능력을 베푸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포기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가지 방법만 고집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께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포기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타협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나는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이 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국 여호와는 불임의 무대에 들어오셔서 생명을 부여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해내시는 용사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일을 삼손이라는 나실인을 통해 이루어나가실 것이다. 그러기에 이 모든 구속의 드라마는 삼손이 평생 나실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역시도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아닌 마노아의 아내, 즉 삼손을 잉태한 여인에게까지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나실인이 아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나실인의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라고 여기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포도주는 일상 주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 쌀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큰 번거로움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지만 늘 대하는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번거로움은 참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구별된 자라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몸에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한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한 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주어진 환경에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환경이 좋지 못할 때 자신들이 처한 처지가 비참하다거나 좋지 않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구원할 자는 환경을 좋게 해주는 메시야일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에 풍족함이 주어질 때는 예수로 기뻐한다고 하면서도 풍족하지 못할 때는 기뻐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나와 우리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가는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환경이 좋아지기 때문입니까?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바쳐진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갈 자로 택함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실인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까지 나실인의 삶이 요구되는 것은 구별된 자를 잉태한 사람답게 구별한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이가 나실인이 안된다든지 무슨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부모가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이 따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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