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속에서 발견하는 나의 모습 ( 1:6-22)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통해 당신의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성경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도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우리의 삶 깊숙이 개입하셔서[단순히 멀리 초월자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재하셔서 간섭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즉 하나님은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성되는 과정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모든 여정들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역사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서 일하심을 드러내는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고! 신약 성경에는 교회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소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이 경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고백을 통해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야 합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경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가 됩니다.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스렸듯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3000 년 전에 나오미를 다스리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나오미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 입에서 나오미가 고백한 그 신앙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것 중에도 룻과 오르바라는 두 여인을 통해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동일한 상황에서 어째서 한 사람은 나오미를 따라가고 한 사람은 떠나가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동일한 조건에서도 각기 다른 두 반응이 나타나는가 입니다. 이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를 떠나고 붙좇는 것을 인간의 의지나 각오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두어야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왜? 떠났고 좇는 사람은 어째서 좇았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룻과 오르바라는 여인들을 보지 말고 이 여인들 뒤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신과는 다른 분이란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예루살렘에서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모압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귀로만 듣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만났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은 당신의 미션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뜻을 포기하게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당신의 백성을 간섭하시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족하던 것을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간증을 합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나서 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했던 것과 같다).

본문은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을 하고 두 며느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약 10년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두 아들을 장가보내는 기쁨도 있었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슬픔도 맛보았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약 10여 년 동안 살면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자식 장가보낼 때는 천국이었는데 남편 잃고 두 아들까지 잃었었을 때는 지옥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돈을 쓸 때는 천국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돈 떨어지자 지옥에서 삽니다. 나오미도 잠시 천국처럼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좌우지간 나오미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삶 속에서 이젠 더 이상 모압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하고선 예루살렘으로 귀향하기를 마음을 먹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자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예루살렘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이 죽자 두 며느리에게 각자가 갈 길을 가라고 권면합니다. 과부로 살지 말고 자기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날 보지 못했느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분명히 잘 보았지 않느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인간이 섬길 만한 신()이 아니란 것입니다.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도다”20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고! 괴롭히고 징벌하는 하나님이고! 풍족한 것을 빈 털털이로 만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찌 믿고 따르겠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섬기던 신()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강의 중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갈아엎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종묘(宗廟)? 조상 신()을 말합니다.사직(社稷)이란? 땅 신()을 말합니다. 종합하면 나에게 유익을 주는 신()을 말합니다. 종묘사직을 갈아엎으란 말은 내게 유익을 주지 않는 조상이나 신()은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신()을 섬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게 유익을 줄 때 조상이고 신()이지 내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신()은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조상이나 신()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아주 실용주의적이지요. 인본주의적인 발언을 한 것입니다. 도올 답구요. 인간은 자기 몸 중심으로 호불호(好不好)를 정합니다.내게 유익되면 우호적이 되고 내게 해를 주면 적대적이 됩니다.

나오미는 간절한 마음으로 며느리들이 자기 곁을 떠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과부가 과부 심정을 안다고 험한 세상 속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죽는 일입니다. 그러니 빨리 살 길을 찾아서 가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에게서 각기 다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오르바는 살 길을 찾아 떠납니다. 하지만 룻은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선 오르바가 훨씬 지혜롭습니다. 룻은 미련합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오르바는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신()이란? 예전에 섬기던 신()이란 말입니다. 예전에 섬기던 신()이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우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르바는 살고자 신()을 바꾸었다가 살기 힘드니 예전에 섬기던 신()을 다시 찾아 간 것[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종묘사직을 갈아 엎은 것입니다. ()을 바꿔 보아도 소용이 없더라! 왜나면 나오미의 가족은 남편부터 시작하여 자식까지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신을 아멘 하면서 따르시겠습니까? 이들을 욕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내가 살아야 신()도 있지 내가 죽고 나면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도올 김용옥 교수처럼 내 삶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종묘사직을 갈아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룻입니다. 룻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룻은 기어이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망하는 길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았어요. 그럼에도 그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건 제 정신이 아닙니다. 뭔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을 치시고 괴롭히고 빼앗아가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지요.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룻은 본성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룻의 결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잠시 룻기의 전체 구조를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래야 룻기의 중심사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룻기는 하나님을 모르던 룻이라는 이방 여자가 하나님을 섬기던 나오미의 도움으로 보아스를 만나서 자식을 낳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다는 내용입니다. 이건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룻기를 보면 1장에서 나오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2장 이후로는 나오미는 뒤로 빠지고 룻이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나오미는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일에 돕는 자로 나타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자식을 낳습니다. 룻이 나오미의 닫혀진 가문을 일으켜 세워준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자식이 아니라 나오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내려가 망한 것은 나오미의 죽음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의지할 근거를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부터 지팡이를 집고 다닙니다.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나오미가 의지할 남편을 잃은 것은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나온 것처럼 나오미가 버려지는 망함(죽음) 속에서 룻이 나온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나님도 버리는 것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룻은 난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어머니의 운명과 함께 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머니의 하나님을 떠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해 버립니다. 

이 고백은 곧 나오미의 고백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서도 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매를 맞으면서도 매를 대시는 그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룻의 고백이 그러합니다. 죽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고 있습니다.마치 나오미가 룻 속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압니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보혜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어맞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세요라고 등떠밀어도 하나님의 백성은 못 떠납니다. 그런데 가짜는 아이고 잘 되었다하고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이방여자를 은혜로 간섭하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 중에 은혜 아니고 무엇입니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룻이 당당히 올라가 있어요. 룻기 마지막에도 이 족보를 말하고 있어요. 룻기를 먼저 읽고 마태복음을 읽어보세요. 

 4:21-22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룻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보세요. 룻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로 나아가지요. 이렇게 되면 룻기는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자 룻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지 룻을 통해서 미리 맛보기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을 통해서 우리 구원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영적 혈통에 들어가게 되는지 말입니다. 오르바나 룻은 동일한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은 저주의 땅입니다. 그럼 둘 다 저주 아래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저주 아래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늙어 소망 없는 나오미에게 룻이 아들을 낳아 준 것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룻을 예수님 계보에 올려놓은 겁니다. 

룻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룻은 뜻하지 않게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나오미의 집안으로 연합이 됩니다. 나오미의 인생으로 편입이 되고 맙니다. 나오미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룻이 나오미가 떠나라고 하여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오미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합이란 말은 강력 본드로 붙여 놓았단 말입니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떨어지면 둘 다 손상을 입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붙여 놓은 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룻에게 오르바처럼 자기 신을 찾아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난다는 것은 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떠나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붙어 있지 않으니 자기 유익을 쫓아서 가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분명히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나는 하나님이 싫습니다! 하고 자기 신()을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룻은 난 하나님이 좋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따릅니다. 오르바와 룻의 이야기를 우리의 현장으로 가져와 볼까요? 두 며느리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성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며느리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룻이라고 한다면 룻이 걸어간 길을 가게 되어 있고, 오르바라고 한다면 오르바가 걸었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르자 돌아가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는 길이라고 합니다.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죠. 그러니 제발 떠나라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명령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떠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면 택한 자와 불 택자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택한 자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불 택자는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오르바가 나오미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간섭하는 하나님을 보니 인간이 믿을 만한 신이 못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다가는 인생 망치겠다고 생각하여 일찌감치 봇다리를 싼 것입니다.

반면에 룻이 나오미를 통하여서 발견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끝까지 간섭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끝까지 찾아가 가만 두지 않고 간섭하는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망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자신의 운명도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효도하기 위해 쫓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좇은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나오미를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룻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로와 상관없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1:6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 까지 이루실 줄을 믿고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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