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기다리는 신앙 ( 3:14-18)

 

한국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빨리빨리입니다. 한마디로 성질이 급한 민족이라는 뜻이겠죠. 대체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이 우수하지만, 그 성향면에서 기다림이 약한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 가운데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면 금방이라도 역사가 일어나야 영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하면 중병환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하고, 오던 비가 금방이라도 그쳐야 되고, 교회 성장도 순식간에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도 예배당에 앉기 시작하면서 언제 끝나나?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시작하면 이 중에서도 언제 끝나나? 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시계를 보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은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릴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확실하게 매듭지어 줄 수 있는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본문이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먼저 나오미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3장 전까는 룻이 주도했지만, 이제 주도권이 나오미에게 넘어 갔습니다. 그런 뒤에 룻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움직여야 할 주체가 룻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아스를 만났고, 보아스를 통해 응답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일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넘어갔습니까? 이제 일의 주도권은 보아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다 끝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아스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계획도 우리가 세웁니다. 일도 우리가 추진합니다. 일하면서 주님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을 받습니다. 그 뒤에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이 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씨앗을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리서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33:2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전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일을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 신자가 할 일은 이제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그러니 어떤 일을 놓고 성급하게 하지 마세요.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 룻은 보아스의 지시대로 몰래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매우 사려가 깊을 뿐 아니라 신중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야밤에 보아스와 룻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였다면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무시하면서 살아도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평가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14:16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 받지 않게 하라” 롬 14:1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후 8:21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지만, 사람 앞에서 복음을 가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지만,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도 되지만,사람들이 외모를 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오해 받을 행동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이 두 부분을 분리해서 생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만 잘하려고 하고, 어떤 분은 사람들 앞에서만 잘하려고 하는 반쪽짜리 신앙인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을 이분법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시에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3:15을 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17절에 보니까 보아스는 룻에게 말하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1:21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그런데 이제 보아스라 룻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나오미의 빈손, 즉 ‘emptiness’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 채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의 빈 손의 시절은 끝났습니다. 보아스가 더 이상 빈 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스릴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네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오미가 누구를 떠날 때 ‘빈 손’이 되었습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돌아올 때 ‘채움’이 시작되었습니까? 그 경계선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의 인생은 ‘채움’의 인생이었고, 하나님 밖에 있을 때 그의 인생은 바로 ‘빈 손’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거할 때, 여러분의 영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빈손입니까? 채워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할렐루야 ^^

 

우리 하나님은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의 텅 빈 시절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시며,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존 칼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행복이 주님 안에 있음을 발견하기까지는 주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니까?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할렐루야^^

 

 3:16절에, 나오미는 돌아온 룻에게 질문합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2장에서는 룻이 밭에서 돌아 왔을 때 나오미는 2:19 “오늘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 것이 당장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나오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를 주었는가? 어디서 주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가 되었는가?”가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된 것입니다.

 

신자 중에 항상 ‘얼마를 얻었는가? 어디서 얻었는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도움을 얻을 때까지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고침받고 나면 그들은 쉽게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문제 해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오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어떤 관계가 되느냐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문제 해결이 시급할지라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나오미가 룻이 가지고 온 양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이제부터 “양식 걱정은 없겠구나”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드디어 보아스가 우리의 기업을 회복시키겠구나. 드디어 이 일이 성취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3:18에 보면 나오미의 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한 번 채워진 양식으로 만족하는 그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양식때문에 나오미가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이제부터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모든 문제를 책임질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나오미가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눈 앞에 닥친 문제 해결에만 급급합니다. 앞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응답이 되어서 기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때문에 기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당장 눈앞에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어디 죽고 사는 문제가 당장 현재의 문제 뿐이던가요? 우리 인생의 문제는 시간, 나이, 장소, 시대에 따라 다 다릅니다. 문제의 양상과 중요도가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예준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네 인생의 문제는 계속 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 간 곳이 어디입니까? , 광야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받고 또 문제를 만나는 일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애굽을 빠져 나오니 홍해가 기다립니다. 홍해를 지나니 쓴 물만 있는 오아시스인 마라를 만납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들은 불평했고 원망했습니다. 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까? 이는 단지 문제만 해결해 주면 고마워했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백성만큼이나 기적을 많이 경험한 백성들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하면서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며,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그 기적의 현장,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에만 급급할 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약속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할렐루야^^

 

보아스가 준 약속의 증표를 본 나오미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46:10 “너희는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출 14:13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찬양)

 

신앙생활은 우리의 시간과 사고에 하나님이 맞추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시간과 사고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3:18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무슨 근거로 나오미가 이런 확신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보아스가 그동안 룻에게 보여준 ‘헤세드’, ‘은혜’에 근거해서 내일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로 과거의 보아스의 신실함을 근거로, 내일의 보아스의 신실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과거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우리가 누구였을 때요? 바로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지금 누구입니까?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도 우리의 신실함을 보이십시다.  1:6 을 보라.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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