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순종하라 ( 3:1-5)

 

오늘 본문이 룻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부도덕한 행위로만 여겨집니다. 어떻게 아녀자가 그것도 한 밤 중에 남자가 잠들어 있는 침상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분명히 이것은 스캔들입니다. 게가다 룻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3: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전혀 주저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습니다. 아주 강하고 담대하게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과 다시 회복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21: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볼 때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여인이 남자의 침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웬만한 담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룻이 엘리멜렉 가족의 기업을 살리는 것은 이처럼 수치와 모욕을 견디는 십자가의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매우 적극적인 대쉬를 의미합니다.  25장에 보면, 기업 무를 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권리는 여성에게 있었습니다. 나오미도 룻이 적극적으로 보아스에게 가서 기업 무를 권리를 요청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8:24-30)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가진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만 만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주님 앞에 어떻게 달려갔습니까? 그녀는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와 멸시 뿐 아니라 심지어 주님으로부터도 ‘이방인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그 딸이 고침 받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수치와 모욕을 견딘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소경 바디매오는 주위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치는 것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룻이 보아스에게 다가가서 기업 무를 권리를 주장하며 청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이며, 룻은 파산한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둘이 정식으로 만나서 결혼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분상으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보아스가 자진해서 기업 무를 권리를 행사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보아스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작마당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축제의 현장에서 룻이 나타나 분위리 깨면서 청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행사가 끝나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접근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인격이나 신앙으로 봐서 한 밤중에 여자가 들어왔다고 함부로 동침할 사람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을 그 시간에 보아스에게 보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때 룻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시어미니가 노망이 들었다고 농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뜻 내키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참된 순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내키지도 않지만 말씀이기에 하는 것이 바로 복받을 순종인 것입니다. 

 

순종은 해 본 자가 또 순종합니다. 순종이 무슨 축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믿음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순종을 하면서 얻어지는 지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순종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신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죄인이었던 신자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큰 축복과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이 축복과 기쁨이 또 다른 순종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순종한 자는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처럼 그의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 더 풍성해지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복과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469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깨내어 가져갈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순종하여 이 축복을 받으십시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물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자기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헛수고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 나가도 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나가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갔습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우리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만을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기 곤란하고, 난처한 것까지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순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들, 이삭 역시 순종의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을 때 그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장명이고, 이 순종의 이어져서 아들 이삭에게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평소에 이삭을 어떻게 교육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여러분의 신앙교육, 순종교육은 어떤가?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 받을 것 같다. 하는 실수도 동일하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 라고 속인 일이다. 상황도 비슷하다. 아브라함 당시에 흉년이 들었던 것과 같이 이삭의 때에 또 흉년이 들었다. 그는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서 블렛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 그때 창 26:2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이번에도 이삭은 믿고 순종하였다.  21:12-14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였다

 

여러분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순종은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 룻은 룻 3:5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리고 고백한 대로 6절에서는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나오미가 며느리 하나는 잘 만난 것 같습니다. 남편, 자식 복은 없는데 며느리 복은 있네요. ㅎㅎ

 

우리의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복 받을 통로는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방팔방이 다 막혀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바라보십시오.( 18)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주님 일 감당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바울과 실라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찬송과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바울과 실라가 옥문이 열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오미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막힌 상황아닙니까? 자신의 힘으로는 기업을 도저히 무를 수 없는 상황아닙니까? 나오미의 회복은 자신의 어떤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아닌 외부적인 도움에 의해서만 회복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외부적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룻을 그녀의 축복의 통로로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

우리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시계처럼 일정하게 순차적으로 살아지나요? 때로는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생깁니까? 건강, 경제적인 문제, 생활 문제, 남편, 자식, 아내 문제, 사업, 직장 문제들 속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이 있냐 이말입니다. 

 

한국시간으로 5 23일에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일입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의 유서에는 그가 대통령 재임시절과 후에 짊어졌던 인생의 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만 인용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이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 가운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모든 인생이 이 필요한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인생의 참된 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재임시절에도 그랬고, 퇴임하고 나서도 그의 영혼은 참된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인된 우리 인생의 구원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 스스로 비참한 죄가운데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 3:16은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은혜가 필요한 우리에게 외부적인 도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어떤 것이 축복의 통로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에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이 축복, 회복의 통로가 되었듯이, 우리의 연약한 인생 가운데 축복, 회복의 통로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의 참된 축복입니다.예수그리스도의 품안이 바로 참된 쉼의 장소입니다. 주님께 오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질문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어서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통치, 지도, 인도를 받아 지금까지 행복했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중에 역대 대통령의 통치를 받아서 당신의 백성이어서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백성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백성의 비애라로 하면, 지도자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키울 생각을 안합니다. 여러분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세요. 좋은 지도자가 준비되는 나라, 그것은 꼭 대통령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는 자신을 잘 인도해 줄 수 있는 최초의 지도자인 부모스승직장의 오너대통령 등 말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나라의 좋은 지도자로 준비되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세요.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그 자리에서 애국하는 길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여러분 인생의 최대의 행복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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