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이유 ( 14:10-20)

 

 

오늘날 영향력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영향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의 크리스찬들을 보면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세상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이 세상과의 차협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인 삼손 역시 실패의 원인이 세상과의 타협에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실패 원인도 여기에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부터 지난 번 처럼 3주에 걸쳐서 그 이유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첫번째로 ‘세상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마귀  하와 (타협)

본문 10절을 읽어 보세요.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는 본문이지만 여기에 상당히 심각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풍습에는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신랑의 아비가 신부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은 거기서 삼손이 잔치를 베풀었다고 말씀합니다. 잔치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마실 것’이라는 뜻으로 술 잔치를 의미합니다. 술을 마셔서는 안 될 나실인 삼손이 술잔치를 직접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왜 삼손은 거기서 술잔치를 열었던 것일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잘 밝히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바로 그 시대 젊은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이게 무슨 뜻일까요? 바로 결혼 상대자도 이방인이었고, 결혼 풍습도 이방인의 풍습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끌여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삼손이 왜 이렇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렇게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멋이 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연예인들처럼 꾸미면, 드라마 주인공처럼 생활하면 행복하게 될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끌려 와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친구가 되려면 네가 가진 그 고집을, 신앙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끌여 다닌다면 그들이 우리의 신앙을 인정해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절대 믿을 수 없는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멋지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멋지게 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영향력이란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를 심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나의 삶이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이미지를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에 끌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의 길에 목숨을 걸 때 그들에게 깊은 이미지를 남기고 참된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력을 회복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십시오. 

 14: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있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삼손과 함께 친구들이 따라 왔다든지 친척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함께 왔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결혼은 고향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 결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진행될 총각파티에 필요한 친구를 붙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그 친구들의 숫자가 3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당시 문화를 보면 왕들이 거느린 신복의 숫자가 3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과시입니다. 사돈의  집안이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집안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30명이라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손이 처름에는 블레셋 여자 한 사람과만 관계를 맺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친구가 30명이나 더 늘어나 버린 것입니다. 삼손이 이들과 무엇을 했겠습니까? 단지 1주일동안 술 마시고 노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삼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기 민족을 압제하는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적인 친구들,  영적인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영혼이 죽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마 삼손은 일주일 동안 정말 껄끄러운 시간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어떤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저에게 하셨습니다. 자기 딸에게 줄 농산물을 준비해 두었는데 그 때 며느리가 놀라온 것입니다. 며느리가 이게 뭐냐고 물었는데, 그때 차마 딸에게 줄 것이라고 말을 못해 그냥 거짓말로 둘러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 때문에 권사님이 세어보니 꼭 16가지 거짓말을 더 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가지만 타협했는데 그 여파는 수십 가지 이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만 타협하고 나머지에서는 꼭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고 점점 더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4: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심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삼손은 그들 30명의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청컨대 내가 수수깨끼를 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낸 것이 아니라, 허락을 받고 수수께끼를 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는 말은 ‘매듭을 묶는다’는 뜻입니다. 매듭을 묶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얽힌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매듭을 묶은 본인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본인만 알 수 있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알아보고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이런 식의 문제를 많이 내었다고 합니다. 결자해지 문제를 묶은 사람, 매듭을 묶은 사람은 다 안다. 

솔로문 시대에 남방의 스바 여황이 솔로몬에게 와서 이런 식의 질문을 많이 던졌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남방 여왕이 가져온 어려운 문제 중에 못 맞춘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왕상 10:1-3). 그 때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칭찬하고 많은 예물을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솜은 이 수수께끼를 내면서 이레 동안의 기간을 주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7일 만에 이 수수께끼를 풀면 자기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베옷이라는 말은 외출할 때 입기도 하고, 또 잠잠때 이불고 쓰기도 하는 긴 옷을 의미합니다. 겉옷이라는 말은 본래 갈아입는 옷이란 뜻인데, 이것은 일상 겉옷이 아니라 행사나 축제를 위한 고급스러운 축제예복을 의미합니다. 이것 30벌씩 주겠다고 했으니 총 60벌의 옷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삼손의 말을 들어보면 일종의 자신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마 그에게 이런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잘 관리할 수 없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자기 은사와 능력을 이용해서 단지 블레셋 사람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에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하고도,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참된 의미를 알자 못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통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만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14: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네가 수수깨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매”

그런데 문제는 만약 그들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그들이 베옷 삼심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큰 판돈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15절에 그들이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상당한 금액에 해당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쉽게 허락합니다. “네가 수수께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아마 그들은 지배국이라는 우월감과 30명이라는 머릴르 믿고 자신있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또 나중에 수수께끼를 대답할 때 시적으로 포현하며 대답한 것으로 보아 공부도 많이 한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4: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삼손의 수수께끼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시에서 사용하는 평행법을 사용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먹는 자가 강한자이고, 먹는 것이 단것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평행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자가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사자가 되고, 먹는 것 중 단 것이 되기 때문에 꿀이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런 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에게도 문학적 감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는 순전히 삼손의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결혼하기 위해서 딤나로 왔다갔다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모아 만든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 벌떼들이 꿀을 만든 것을 보고 만든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아무도 맞출 수가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삼손에게는 나눌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타협하며 질질 끌려 다니다 보니까 의미 없는 수수께끼 놀이나 하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험으로 간증을 나누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함께 믿음으로 일어서고, 비전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간증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이런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하고, 내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런 간증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간증의 사람으로 세상을 멋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여러분을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은 끌어 당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끌여오도록 매력적인 인생을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분명히 입증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영향력의 사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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