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이유 2: 세상의 배신을 당한 것이기 때문 ( 14:15-18)

 

신자는 세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신자가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이유을 우리는 상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절대로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일곱째 날이 되자 그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삼손을 협작하지 않고 삼손의 아내를 협박했습니다.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공갈협박까지 일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소유를 빼앗고자 한다는 말은 신명기나 여호수아에서 정복 전쟁에서 사용된 용어입니다. 이것은 먼저 있던 지역 사람들을 내쫓고 대신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블레셋 친구들은 그들이 이 내기에서 지면 자기들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교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삼손에게 직접가가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아내를 협박합니다. 뱀이 하와를 통해 아담을 넘어뜨린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공갈 협박을 이용해서라도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기기 위해 매우 비겁하고 간교한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규칙도 어기고, 예의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가 이기기 위해 온갖 더러운 방법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과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14:16을 보세요. “삼손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한는지라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삼손의 아내는 자기 집이 불타서 비참하게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이 불타서 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삼손을 꾀어 수수께끼를 말하게 하고 내기에서 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삼손의 앞에서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결혼 첫날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고, 사랑하지 않을 뿐이고, 수수께끼의 답도 내게 알려 주지도 않을 뿐이고” 이런 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딱 잘라서 대답을 거절합니다. 

“칠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 14:17)

그녀는 7일동안의 잔치 동안 이 답을 알아내기 위해 울면서 삼손에게 강요했습니다. 정말 행복해야 할 결혼잔치가 눈물의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을 신뢰할 수 없었고 결국 30명이라는 그 숫자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집을 보호하고, 삼손을 지키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9절에 보면 삼손은 화가 나서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또 삿 15:6에 보면 삼손이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복하게 되고, 여기에 광분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라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일곱 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 14:18)

일곱째 날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왔습니다. 해 지기 전이라고 하면 날이 바뀌기 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정이 되면 날이 바뀌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해가 지면 날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날의 개념을 저녁에 새 날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해 지기 전에 왔다는 것은 날이 바뀌기 일보직전에 왔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때가 날이 바뀌기 약15분전 쯤이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이 답을 알자마자 왜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이것은 삼손의 약을 올리기 위해 이렇게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손이 다 이겼다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찾아와서 완전 역전시켜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였습니다. 그들은 “먹는 자 중 강한 것은 사자이고, 먹는 음식 중 단 것은 꿀이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대답하였습니다. 또 히브리어 원문은 삼손이 수수께끼를 낸 문장과 정확하게 단어 수가 동일한 문장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적 수순이 높은 엘리트 계층이며 그들의 문학적인 기교도 상당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전혀 못 맞출 것 같았던 그들이 이처럼 알아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삼손이 그 사자보다 더 강한 자임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삼손은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라고 대답합니다. 본문에 “내 암송아지로”라는 말은 “내 암송아지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오직 남편인 자기를 통해서만 움직여야 하는데, 다른 남자들에게 조종당하는 자기 아내를 암소에 비유한 것입니다. 

삼손의 대답 역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문학적인 대답입니다. 너희가 규칙을 어기지만 않았다면 절재 풀 수 없는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반칙을 썼기 때문에 삼손도 그들에게 상을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들에게 상을 주기로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분명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것들이 세상과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세상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넘어지면 조롱하고, 짓밟고, 배신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라”라고 말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거싱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넘어지면 조롱하고, 짓밟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그것이 뭔가 통하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며 세상과 손잡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자는 오늘 본문의 삼손처럼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끌려 가는 크리스챤을 행해 잠 7:21-23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과 손잡고 살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피해야 할 것들을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중에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판단의 근거가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판단의 근거,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평가하고 어떤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내가 삼손을 도와야 할 상황에 아내는 그만 중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삼손은 아내와 처가를 다 잃었습니다. 일주일 간의 잔치는 슬픔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의 결과입니다. 무엇인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판단을 내리기까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가운데 기도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렵고 두려운 것은 결과아닌가요? 나의 판단으로 인해 올 결과를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우리는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내린 판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삼손, 한 사람이 잘 못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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